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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안강휘, '성녀' 본문

독후감

안강휘, '성녀'

물고기군 2002. 2. 3. 18:00

내게 있어, '생(生)'이라는 말은, 그와 뜻이 비슷한 '삶', '인생' 등과는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삶'은 현재적이고 지속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고, '인생'은 개체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인간 개체 전체의 삶'이라는 추상성을 담고 있다. 대신 '생'은 단위적이고 완결적이다. 개체적이면서 구체적이다. 거기에는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까지의 전과정이 담겨있다. 이런 식으로 '생'이라는 단어를 정의내리고 나면, 분명 '생'이라는 말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만 쓸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의 조사에서나 쓰일 법한 말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다. 가령 '나의 생(生)'이라고 말한다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과, 또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 전체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직 살아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들은 하나의 생을 살고 있는 것이며, 또한 하나의 생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성녀'는 그런 생(生)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단순히 이 이야기가 한 여자의 탄생과 죽음까지의 전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이야기는 인간에게 반드시 주어져 있는 하나의 '생'을, 그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단위적면서 완결적인 '생'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생'이라는 단어는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생'의 완결성은, '유한자'로서의 인간의 숙명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있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라는 의미로서의 완결성이 아니다. 거기에는 숙명이나 체념의 뉘앙스가 없다. 오히려 거기에는 충분함에 대한 만족, 과장해서 말한다면, 기쁨이나 감격의 뉘앙스가 있다. 하나의 단위로서의 생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분하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만일 우리의 머리 위에 관뚜껑이 덮여지는 순간까지 우리에게 의식이 남아있다면, '아, 이걸로 충분했다. 모든 게 완성되었다.'라는 감격이 담겨 있다.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감격이나 감사뿐만 아니라, 이제 여기서 죽는다는, 그리고 그 죽음으로써 하나의 생이 완성된다는 기쁨을 담고 있다. 그것이 '생'이다. 그 '생'이 바로 우리에게 지금 꼭 하나씩만 주어져 있다. 

자신의 생 대부분을, 지구의 반바퀴나 되는 거리를 비행하는 데 허비하는 철새가 있다.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먼 거리를 날아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그들의 비행의 이유를, 따뜻한 날씨나, 종족보존의 본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들과 함께 그 먼 길을 날아볼 수만 있다면,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해 저물 무렵 붉게 물든 하늘 위를 무리지어 날고 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에는 무언가 고귀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삶'이나, '생활', 또는 '인생'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무엇을 위해서? 그게 무엇이지? 돈이나 명예, 생활의 만족,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힘(권력).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바로 그들이 우리들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보라. '생'이란 무엇인가? 왜 철새들은 그렇게 먼 거리를 날고 있는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건, 인간의 권리라고 한다. 실제로 그러한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대체 그것을 누가 주고 있고, 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분명 그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 보호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한 가지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혹 그것이 거꾸로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이다. 그러니까, 행복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원인이나 결과가 될 수 있을 뿐이지 않을까? '생'이 정말로 완결적인 것이라면, 인간의 '생'이란 탄생의 순간부터 행복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죽음으로써 행복이 완성되는 게 아닐까? 행복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의 추구를 통해 결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 현실적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인간의 '생'들을,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세상의 종교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지금 이곳의 삶은 고통일지라도, 다른 축복된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 묵묵히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다. 인간의 '생'에는 저마다의 고귀함이 있다. 이 말을 '생명의 고귀함', '인권의 존중'같은 의미로 쓴 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뭔가 '한 가지 이유'는 있을 것이다. 때로 이런 주제는 분명 종교적인 영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현실의 종교가 그 해답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생'은 언제나 개별적이면서 완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의 구원, 또는 다른 생을 약속할 필요는 없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 한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제각기 다른, 하나씩의 '생'들이다. 그 하나 하나의 '생'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고, 집단이 개인에게 부당한 힘을 행사하는 이 괴물 같은 세상에서, 또한 고립적이고, 한없이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오천명의 자국민이 죽었다고, 그 보복으로 아무 상관도 없고, 힘도 없는 오만명의 사람들을 난민으로 만드는 이 세상에서, 그 하나 하나의 '생'들은 언제나 무력하다. 무력감은, '생'의 완결성을 훼손시키고, 분명 어딘가에 있을 한 가지의 이유를, 그리고 그 질문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성당이 있는 사거리의 북쪽에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기억을 지워주는 한 여자가 살고 있다. 가족이 없이 그녀는 가로세로가 모두 5미터인 좁은 방에서 혼자 외롭고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생'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소박한 것이었다.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므로 남들과 다른 생을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그녀는 믿었다. 물론 그 믿음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의 그 믿음과 확신은, 그녀의 '생'을 완결시켰다. 우리는 그녀의 생을 통해, '생'의 고귀함, 한 가지의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성녀'를 다시 읽었다. 내 머리 위로 덮여질 관뚜껑이나, 지구의 반바퀴를 비행하는 철새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과연 내게, 그녀와 같은 믿음과 확신이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이건 다른 얘기인데, 내가 작가를 개인적으로 모르고, 만일 어느 문예지에서나 또는 우연히 얻게 된 창작집에서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나는 분명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몽땅 구해서 읽고 싶어졌을 것이다. 확실히 어떤 작품들은, 그러한 힘이 있다. 과연 이 작품을 쓴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떠한 것일까,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굉장히 잘 썼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전자의 경우가 (비록 문장들이 서툴고, 완결성이 떨어지더라도) 훨씬 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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