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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구제불능이란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hopeless 라고 하더군. 다시 번역하면, '희망없는'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희망이라는 것이, '구제'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을까? 나도 물론 '희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는 나를 '희망'없는 놈 쯤으로 여기는지도 모르지. 말 그대로, '구제불능'이라고 말이야. 많은 시간이 흘렀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그리고 또 대만에서는, 약 한 시간 정도 비행기에서 내려 대기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파리에서 한국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열 여섯시간 정도. 대만에서 다시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후배의 창가자리를 뺐었다. 대만에서 한국까지, 두 시간 내내 나는 창 밖을 보면서 왔다. 기내음악으로 한국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 년도 전의 노래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던 노래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개의 노래들은 내가 아는 것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구름은 멋지다. 더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짙은 청색의 바다 위로 구름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도시는 어디나 비슷비슷하다. 잘 사는 사람들이 있고, 거지가 있다. 젊은이들, 늙은이들, 경찰들, 범죄자들, 연인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 다, 우울한 풍경이다. - 마드리드
파리다. 이상한 일이다. 파리에서는 파리 냄새가 난다. 항상 기억이란 것은, 그것이 감각적으로 반복되었을 때 깨닫게 된다.
비닐에 덮인 소파, 거실을 가득 메운 오전의 하얀 햇살, 햇살 속을 고요하게 떠다니는 먼지, 담배 한 대, 맨 발, 액자가 떼어진 텅 빈 벽의 얼룩들, 그 자리에 대체 뭐가 걸려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빈자리들, 기억, 고통.
난 자주 나에게 어떤 시간들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는 법.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어떤' 시간이다.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차를 몰고 새벽의 거리를 달린다. 여자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 약 이십 분 정도 걸렸다. 난, 차를 파킹시키고, 시동을 끈다. 시간은 일정해서, 언제나 열 두시 이십 분에서, 사십 분 사이 정도. 난 혼자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조금 더 듣는다. 이전에는 없던 버릇이다. 난, 라디오를 즐겨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디오의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사연을 읽어주기도 하고, 직접 청취자와 전화통화를 하기도 한다. 패널이 나와서, 진행자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오면서, 그녀 생각이 났다. 갑자기, 그 라디오 ..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은 데, 화를 낼 만한 사람이 없다. 아무도,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하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이해할 것이다. 각자 살아가는 거다. 결국 잘못은 항상 내가 저지른다.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야간 화물트럭 운전사가 되고 싶다. 물론,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실제로 야간 화물트럭 운전사는, 내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를 것이다. 나는 밤새 달려서 꼭 가야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가야만 하는 곳이다. 가보았댔자, 그저 화물을 내려주고, 혼자서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 먹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다시 되돌아와야 할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람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야만 했었고, 갔다. 아무것도 판단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내가 가야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