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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김화영, 문학동네, 1998 내가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군에 있을 때였다. 나는 군대에서 그의 소설 '청춘시절'을 읽었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책이었는데, 책의 표지가 너무 촌스러워서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청춘시절'이라니. 하지만 군대에서의 나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내가 쓴 최근의 소설에서, 나는 '청춘시절'이라는 단어를 기어코 썼는데, 그것이 모디아노의 작품에서 비롯된 단어인지, 아니면 실제로 내가 군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 스스로 썼던 단어인지, 이제와서는 잘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날 밤, 어떤 한 시절이 ..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강원도의 힘'에 대해 들었다. 대개는, '참 좋다'는 쪽이어서, 그러면 나도 꼭 한 번 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죽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기회가 닿으면, 가령 잊고 있다가 우연히 비디오 샵에 꽂혀있는 여러 영화들 중 그 제목이 눈에 쑥 들어와도, 뽑아들지 못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누구로부터 아무 얘기도 듣지 않았는데도, 선뜻 집어 들어 본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가 나를 실망시켰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고,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두 번쯤 보았던 것 같다. 감독의 전작 영화에 대해 실망한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추천을 받았음에도, 어쩐..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으로 내가 맨 처음 읽은 것은,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이 1986년 작이고, [겨울아이]가 1995년이니까, 그 사이 거진 10년의 기간이 있는 셈이다. 간략한 저자 약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콧수염]을 통해 이미 진정한 작가의 대열로 올라선 한 작가에게 주어진 10년은 분명 긴 시간이고, 의미심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겨울아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10년의 기간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과연 그렇다면, 그 10년 동안 엠마뉘엘 카레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역시 저자약력과 작품해설을 보면, 카레르를 '눈속임의 전문가이며 괴기담의 대가' 그리고 '능수능란한 을 구사하여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이성이 상상 앞에서 흔들리고, 부조리 앞에서 논리가 굴..
랄프 루드비히, "쉽게 읽는 칸트 - 순수이성비판", 박중목, 이학사, 2000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된 건 1781년이다. 재판이 1787년으로 우리가 현재 대개 읽게되는 번역본은 재판이다. 그러니까, 200년도 훨씬 전의 책인 셈이다. 200년도 훨씬 전의 인간이 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200년도 훨씬 전의 인간의 사유를 읽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 시절 그(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원전을 읽기 전에, 입문서를 먼저 훑어보는 게 과연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아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로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신경 쓰지 않는다. 기회가 닿으면, 입문서를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원전을..
어쩐일인지, 요즘은 주말마다 집에서 '뒹굴뒹굴'하게 된다. 요즘이라고 했지만, 언제 주말에 바빠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오래되었다. 뭐, 그게 고통스럽다거나 비참하다는 건 아니다. 인생이란 건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아니 오히려 한가한만큼 즐거운 법이니까. 아무튼, 케이블 TV를 벗삼아 하루 종일 지내다 보면 뜻밖에 멋진 영화를 보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케이블 TV라는 건 마치 라디오와 같다. 같은 노래라도, 일부러 직접 골라서 듣는 것보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될 때 더 감흥이 더 크다. 막 고추와 햄을 송송 썰어넣은 특식 라면을 끓여먹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문득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가 눈에 잡혔다. 제목은 '서유기'. 근데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
레이몬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집사재, 1996 나는 카버의 소설에서 많은 것, 스타일과 방법 이상의 무언가를 배웠다. 그는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그가 남긴 그 공백을 대신 메우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의 말에서, '카버'를 '하루키'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어쩜 나의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알게된 건, 고 3내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녀석 때문이다. 정확한 문맥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는 문득 '상실의 시대'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병'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바로 그때 나는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너는 마치 어떤 소설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 병에 걸린 것 같..
아직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개봉되지도 않은, 오시이 마모루(Mamoru Oshi) 감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는 뜻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1996년 미국과 영국에서 개봉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영화적 완성도를 인정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후 제작된 뤽 베송의 "제 5원소"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가 [공각기동대]의 여러 장면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각기동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영향관계를 따지자면 [공각기동대] 또한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런너]가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물..
미야자키 하야오, "이웃집 토토로", 지브리, 1988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맨 먼저 든 생각은, 그가 자신을 깊숙이 숨겼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쩐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더욱 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나우시카'같은 얘기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토토로는, 뭐랄까, 훨씬 밑바닥에 있는 의식이다. 만일 누군가 '세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훼손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이 아름답다는 그의 견해는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한 견해가 기본이 되었을 때, 그에 합당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웃집 토토로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잃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