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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 무라카미 류, [69], 양억관옮김, (예문, 1996) 읽으면서 내내,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꽤나 열심히 읽던 학원소설이나, 하이틴 로맨스가 생각났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라면 알겠지만, 학원소설은 조흔파의 '얄개전'이나 오영민의 '내일모레글피', 그리고 작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쌍무지개 뜨는 언덕' 같은 소설을 말한다. 어째서 학원소설이었을까? 당시에는 본격적인 만화잡지 같은 게 없었다. 그러니까, '보물섬'도 나오기 전이다. 그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잡지는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였다. 물론 '어깨동무'나 '새소년'은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다른 잡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학원소설이란 그런 잡지에 연재되던 소설이었다...
비디오로 본 영화다. 어째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까? 아, 예전에 동네친구였던 녀석이 내게 권해준 영화다. 그 친구는 1년 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다. 나와는 모든 게 다른 녀석이었다. 끔찍하게 성실하고, 속이야 어떤지 모르지만 겉보기에는 한없이 단순하고 태평한 것처럼 보이는 녀석이었다. 술도 안 한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가끔 내가 많이 손해본 느낌이 드는데, 단 한번도 속얘기를 서로 나눠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친구란 건,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 친구가 되는 것 같다. 서로를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모든 걸 망친다. 아무튼 그렇게 정반대였던 친구가, 재밌다며 보라던 영화였다. 아마 '너라면 재밌어야 할 영화야'라..
1. '사라졌다.'· '잃었다.'· '떠났다.''사라졌다.'는 진술은 '잃었다.' 또는 '떠났다.'라는 진술과 다르다. 그 다름은, 상당히 직관적이지만, 곰곰 따져보면 어떠한 대상이 '없어졌다.'는 결과는 똑같다. 그러니까, 나는 지갑을 잃어버렸다. 지갑은 사라졌다. 어쩌면 지갑이 나를 떠났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라는 존재, 또는 나라는 존재를 포함하고 상황에서 지갑은 '없어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위의 세가지 진술은 어떻게 다른 걸까? 내 설명은 이렇다. 일단 '떠났다.'는 그 대상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갑이 '떠났다'라고 표현하는 건, 단순한 의인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잃었다.'는 대상을 향한 주체와의 관계, 어떤 면에서는 '소유'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즉, '잃었다.'는 ..
'문(門)'의 비밀 모든 문에는 손잡이가 달려있다. 손잡이가 달려있지 않은 건, 문이 아니다. 우린 그것을 벽이라 부른다. 손잡이는 문을 벽이면서 동시에 통로이게 만든다. 문의 역설, 열림과 닫힘의 테마는 소통과 단절의 테마다. 그러나 축자적으로 벽을 단절로, 통로를 소통으로 여겨선 안 된다. 이를테면, 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소통할 수 있고, 단절할 수 있다. 먼저 이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벽은 통로이고, 통로는 벽이며, 그러기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렌즈'는 소통과 단절의 테마를 기본으로 출발하지만, 놀랍게도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소통은 단절이며 단절은 소통이라는 역설을 보여준다. 실제로 문의 상징성 자체가 이미 그것을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소설..
동의할 수 없는 방식들, 투덜거림 권호의 글을 보면, 또 어쩔 수 없이 그의 전적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감방에 갔다온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다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거기엔 분명 잘못이 있다. 왜냐하면, 감방에 가는 이유는 각자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 권호가 뭔가 큰 죄를 지은 것같이 말한 셈이 되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권호만은 알 거라고 믿는다. 예전부터, '시'를 쓰다 소설을 쓰는 인간을 잘 신용하지 않았다. 어떤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다분히, 처음부터 소설을 써 왔던 나 자신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같은 거리라. 또한, 경험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그러한 전적을 가진 인간들의 글은, 분명 어떤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
세미나를 통해서 이미 했던 말이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 무엇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내가 느끼는 감정, 또는 평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보편타당한 원칙 위에 근거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보편타당한 원칙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역시 문제는 나라는 한 개인(비록 엉성하지만 소설을 쓰려고 하는 소설 지망생)이 소설이나 소설의 문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고한 원칙이고, 그 원칙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가진 원칙은 불분명하고, 내 자신조차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미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미색 붙박이장'에 대해,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