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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나는 한국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다. 한 개 시장, 즉 우리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과, 세계적으로 - 적어도 두 개 이상 나라에서 검증받은 소설 중에, 어느 게 더 좋은 소설일 확률이 높느냐 하면, 아무래도 후자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장이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어떤 세계적인 작가의 소설보다 더 훌륭한 한국소설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또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찾기 위해, 과연 내가 얼만큼이나 시간을 쓸 수 있느냐 하면, ‘글쎄올시다’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정말 좋은 소설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것들 전부를 내가 읽을 수도 없는데, 이를테면 내가 정말로 좋아..
생각해보면 나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여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최근에 그녀의 영화 세 편(‘언더 더 스킨’, ‘루시’, ‘her’)을 우연찮게(?) 연달아 보고 나서 뭔가 써볼까 싶어, 그녀에 대해 내가 뭘 알고 있는지 떠올려보니, 할 만한 얘기가 꽤 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영화를 꽤 많이 본 사람은 꽤 많을 것이다. 유명한 여배우니까. 하지만 어떤 여배우의 영화를 꽤 많이 봤다고 해서, 그 영화에 대해 모두 꽤 많은 할 얘기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따져보니 나는 그렇다. 그런 면에서 스칼렛 요한슨은 적어도 나한테는 꽤 의미있는 여배우인 것 같다. 내가 제일 처음 본 그녀의 영화가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제 얘기 할 세 편의 영화 ..
내게 있어, '생(生)'이라는 말은, 그와 뜻이 비슷한 '삶', '인생' 등과는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삶'은 현재적이고 지속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고, '인생'은 개체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인간 개체 전체의 삶'이라는 추상성을 담고 있다. 대신 '생'은 단위적이고 완결적이다. 개체적이면서 구체적이다. 거기에는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까지의 전과정이 담겨있다. 이런 식으로 '생'이라는 단어를 정의내리고 나면, 분명 '생'이라는 말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만 쓸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의 조사에서나 쓰일 법한 말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다. 가령 '나의 생(生)'이라고 말한다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과, 또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 전체를 지칭할 수 있다...
1. 성장소설 이 작품이 꼭 성장소설이라는 건 아니지만, 나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든지, '데미안', '파리대왕', '죄와 벌'같은 식의 소설을 좋아한다. 성장소설은 항상 두 개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의 세계에서, 또 하나의 세계로의 이동 또는 진입을, 우리는 아마 '성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리라. 그 두 개의 세계를 각각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느 편이 더 올바른 형태의 세계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물론 대개는 전자, 즉 성장 이전의 세계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다. 편의상 그것을 '아이의 세계', 그리고 다른 하나를 '어른의 세계'라 부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전자를 소설 속의 표현을 따서 '보드랍고 따뜻한 세계'라 이름 ..
조셉 콘래드, "암흑의 핵심", 이상옥, 민음사, 1998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7권에 속하는 책이다. 표지에 작가의 사진인지 초상화인지 모를 것이 그려져 있는데, 눈두덩이 쑥 들어가고 코가 크고 콧날이 오뚝한 게, 퍽 남성적으로 잘 생긴 얼굴이다. 코 아래부터 조명 탓인지도 모르지만, 검은 수염이 무성하다. 시선은 오른편 상단을 향하고 있는데, 노려보는 듯한 강한 눈빛은 아니고, 그저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이다. 마치 상갑판의 조타실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듯이. 이 책은 사실 꽤 오래 전에 구입한 책인데, 최근에야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었다. 처음 도입부가 - 100년 전의 소설인 탓인지 조금 어설프다고 느껴졌지만 읽어나갈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나 자신의 독서경향을 말하라 한..
지금껏 폴 오스터의 소설은, "달의 궁전"부터 시작해서, "우연의 음악", "거대한 괴물", 그리고 이번 소설 "동행"까지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달의 궁전"을 먼저 읽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달이라는 '사물'에 관심이 있었고, 또 그 작품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아무튼, 매번 읽을 때마다, 그것이 작은 감탄이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큰 감탄이든, 분명 감탄할 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감탄이었다. '야, 이렇게 소설을 쓰네. 어떻게 여기서 여기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읽을 때면 나의 관심은 온통 문장에만 있었던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 "서커스가 지나간다", 용경식, 고려원, 1994. 내가 읽은 모디아노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청춘시절'과 '아득한 기억의 저편'과 흡사한 작품이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거리를 걷고, 카페에 들어가고, 낡은 아파트, 희미하게 비치는 햇살, 벨벳 장의자에 앉아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 여자는 몸을 팔고, 남자는 여자를 구원하려 한다. 그들은 항상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려하지만, 결국은 실패한다. 이 소설은 '내가 열여덟 살 때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나'는 "극장에도 가고 서점에도 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경찰서에서 여자를 만난다. '나'의 심문이 끝나고 다음차례..
파트릭 모디아노, "아득한 기억의 저편", 연미선, 자작나무, 1999 이 소설의 원제목은, "Du plus loin de l'oubli"(망각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이다. 그 뜻을 손상시키지 않고,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우리말 제목으로 바꾼 셈이다. 모디아노의 대개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혹은 그러할 거라고 짐작하듯이), 이 작품 역시, '잊음(잃음)'의 테마를 변주하고 있다. 그것은 역시 하나의 공간을 고스란히 그대로 담고 있는 시간의 잃음이다. 그러나 그 '잃음'은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일반적인 그것을 넘어서, 어쩌면 인간 실존에 숙명적으로 새겨져 있는 어떤 '빈 곳'을 지적하고 있다. 모디아노는 그래서 '어두운'이나, '사라진', 또는 '희미한'이란 형용사에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