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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인생이란, 마치 한편의 경기와 같다. 이것은 비유다. 비유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말이다. 농구경기를 보다보면, 항상 관중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수비일 때, 큰 소리로 '디펜스'를 외친다. 해설자는 , '이번 수비를 잘 막아야 됩니다' 또는 '경기가 안 될 때, 수비에서 풀어야죠'라고 말한다. 그렇다. 수비에서 풀어야 한다. 이것도 비유다. 더 이상 생각을 진행시키지 말자. 다만 수비하자. 학교에도 열심히 나가고, 책도 읽고, 가끔 여자도 그리워하면서, 살자. 나에게 아직 그만한 시간은 남아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언젠가 '경기의 흐름은 바뀔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터무니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역시 어느 때에는 내가 터무니없는 '미움' 또는 '경멸'을 당하고 느낄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로선 당황스러운 일이다. 두렵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건 차라리, '그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체념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어떤 노력도 무용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름대로 마음 편한 일일지 모르나, 오늘 문득, 그 생각이 나를 쓸쓸하게 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진정으로 나눌 수 없는 걸까? 전철을 기라리면서, 어둔 밤하늘의 한없이 다정한 불빛들처럼.
사람마다, 자기식의 소설작법이 있으리라 믿는다. 아니,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나의 경우, 항상 스스로도 부끄러워 하는 거지만, 마치 일기를 적듯이 소설을 쓴다. 내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해서 마무리를 지으면 소설이 된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의식의 일부를 소설에서 확인한다. 많은 경우에, 그건 소설이 되지 않는다. 개인낙서정도다. 문맥은 항상 어긋나고, 처음의 의식과 중간과 끝의 의식은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소설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기억해봐야 한다. 마침내, 내 정확한 '말'을 찾아냈을 때, 이미 내 소설은 치명적으로 뒤틀려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식을 나는 스스로 버리지 못한다. 이 방식이 '나'고,..
난 자주 나에게 어떤 시간들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는 법.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어떤' 시간이다.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차를 몰고 새벽의 거리를 달린다. 여자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 약 이십 분 정도 걸렸다. 난, 차를 파킹시키고, 시동을 끈다. 시간은 일정해서, 언제나 열 두시 이십 분에서, 사십 분 사이 정도. 난 혼자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조금 더 듣는다. 이전에는 없던 버릇이다. 난, 라디오를 즐겨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디오의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사연을 읽어주기도 하고, 직접 청취자와 전화통화를 하기도 한다. 패널이 나와서, 진행자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오면서, 그녀 생각이 났다. 갑자기, 그 라디오 ..
이틀 간, 죽어 있었습니다. 시체놀이를 했습니다. 아, 한 편의 소설을 끝내고 나니, 또 내 자신을 놓아주고 싶었던가 봅니다. 그 날 밤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누군가 잘 모르는 사람도 왔다 가고, 재혁 군의 얼굴도 본 기억이 나는군요. 노래방에 가서 맥주를 마셨던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이 두려워지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한없는 기대와, 꼭 그만한 실망의 낙차를 이해할 뿐입니다. 난 생을 기대하지 않는데, 자꾸 생은 나를 기대하는군요. 내가 나를 기대하는군요. 새벽입니다. 내 소설 속으로, 그 비린내가 나는 새벽의 거리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내가 소설 속에 머무는 시간이 좋습니다.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그렇게 어..
세미나를 시작하기 전, 정확히 말해서 규열군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감상과 문제점들을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죠, 라고 말하는 순간, 난 '내 변명'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던 것이, 그들은 너무나 관대했고, 난 '변명'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적어도 내 '변명'이 궁색하지 않도록 만들어주었다. 한 문장으로 전달 할 수 있는 이미지를, 난 열 문장으로 지지부진하게 풀어냈고, 별 대단하지도 않는 사변들을 떠벌렸다. 소설 속에서, 난 수없이 게을렀고, 치기 어렸고, 치졸했다. 내 이미지들은, 지극히 '헐리우드'적이었고(이 약점은, 내가 1학년 첫 세미나때부터 지적되었던 것이다), 자주 소설의 핵심에 기여하지 못했다. 문작가가 작품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내가 필요..
내가 워크맨을 듣기 시작한 건, 재수 때부터였다. 좀 외로웠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내 외로움의 내력은 깊다. 난, 내 삶을 가끔 돌아보면서,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아, 그래서 지금의 내가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구나 분석하곤 했다. 난, 내 외로움의 이유를 알고 있다. 아무튼, 학원의 야간자율 학습시간이나 자율학습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일상적으로 워크맨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었다. 그 시절 내가 들었던 노래는, '에어서플라이'와 '봄여름가을겨울'이었다. 특히, 에어서플라이는 요즘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게 될 때면, 난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게 된다. 내가 그 시절을, 그 노래의 시절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뭐 이런 종류의 감정을 가지는 건 아니다. 돌아가고 ..
오래전에, 이건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내가 군대를 가기 전인지 갔다온 후인지도 모르겠다, 내 동기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고 싶어'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고, 집으로 가는 차는 이미 끊겼다. 다행히, 계절은 여름이어서 얼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우린, 남은 돈을 다 털어서 맥주를 샀고, 가로등도 꺼진 노천극장으로 올라갔다. 한심했다. 우린,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 대가로 자기 집, 자기 방에서의 달콤한 잠과, 편안한 아침을 잃어버렸다. 달이 무척이나 밝은 밤이었다. 노천에서 밤을 새워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달은 항상 '잘살기 탑' 위에 떠 있다. 난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한 때는, 호감을 가졌던 여자였는데 곁에서 한 달쯤 지켜본 뒤에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여자의 그런 말을 듣고, 난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