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01/09 (18)
시간의재
나는 종종 다른 사람의 무엇으로 내 자신을 규정하면서 힘을 얻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의 무엇'이란 결코 내 자신의 규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취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나의 무엇'이다. 즉, 거짓이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으로 내가 맨 처음 읽은 것은,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이 1986년 작이고, [겨울아이]가 1995년이니까, 그 사이 거진 10년의 기간이 있는 셈이다. 간략한 저자 약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콧수염]을 통해 이미 진정한 작가의 대열로 올라선 한 작가에게 주어진 10년은 분명 긴 시간이고, 의미심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겨울아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10년의 기간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과연 그렇다면, 그 10년 동안 엠마뉘엘 카레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역시 저자약력과 작품해설을 보면, 카레르를 '눈속임의 전문가이며 괴기담의 대가' 그리고 '능수능란한 을 구사하여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이성이 상상 앞에서 흔들리고, 부조리 앞에서 논리가 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처음부터 몰랐고, 그리고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나는 '그 일'을 이용해서 현재의 나를 구제하고자 한다.
'모레 오전에 시간 있으세요? 정원 청소 좀 하려고 하는데...'하고 직원이 내게 물었다. '목요일이요?' '아니, 일요일이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저녁 시간에 종로에 잠깐 나갔다. 책을 몇 권 구하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벌써 겨울 군것질 거리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릿노릿한 계란 빵 같은 것 말이다. 금새 오방떡이니, 군밤이니, 고구마니 하는 것들도 잇따라 나올 것이다. 아, 추워라 하고 고개를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종종걸음을 칠, 겨울이 오늘 저녁 벌써 다가와 버린 기분이었다. 아직 반바지를 입은 젊은 사람 몇몇이 보였지만, 선택을 잘못했다는 걸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종로 거리는 겨울에 잘 어울린다. 여름 종로는 지저분한 느낌..
랄프 루드비히, "쉽게 읽는 칸트 - 순수이성비판", 박중목, 이학사, 2000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된 건 1781년이다. 재판이 1787년으로 우리가 현재 대개 읽게되는 번역본은 재판이다. 그러니까, 200년도 훨씬 전의 책인 셈이다. 200년도 훨씬 전의 인간이 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200년도 훨씬 전의 인간의 사유를 읽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 시절 그(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원전을 읽기 전에, 입문서를 먼저 훑어보는 게 과연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아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로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신경 쓰지 않는다. 기회가 닿으면, 입문서를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원전을..
어쩐일인지, 요즘은 주말마다 집에서 '뒹굴뒹굴'하게 된다. 요즘이라고 했지만, 언제 주말에 바빠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오래되었다. 뭐, 그게 고통스럽다거나 비참하다는 건 아니다. 인생이란 건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아니 오히려 한가한만큼 즐거운 법이니까. 아무튼, 케이블 TV를 벗삼아 하루 종일 지내다 보면 뜻밖에 멋진 영화를 보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케이블 TV라는 건 마치 라디오와 같다. 같은 노래라도, 일부러 직접 골라서 듣는 것보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될 때 더 감흥이 더 크다. 막 고추와 햄을 송송 썰어넣은 특식 라면을 끓여먹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문득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가 눈에 잡혔다. 제목은 '서유기'. 근데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
레이몬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집사재, 1996 나는 카버의 소설에서 많은 것, 스타일과 방법 이상의 무언가를 배웠다. 그는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그가 남긴 그 공백을 대신 메우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의 말에서, '카버'를 '하루키'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어쩜 나의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알게된 건, 고 3내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녀석 때문이다. 정확한 문맥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는 문득 '상실의 시대'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병'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바로 그때 나는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너는 마치 어떤 소설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 병에 걸린 것 같..
아직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개봉되지도 않은, 오시이 마모루(Mamoru Oshi) 감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는 뜻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1996년 미국과 영국에서 개봉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영화적 완성도를 인정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후 제작된 뤽 베송의 "제 5원소"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가 [공각기동대]의 여러 장면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각기동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영향관계를 따지자면 [공각기동대] 또한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런너]가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