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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고양이는 가끔 보이지 않는 뭔가를 바라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고양이를 길렀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나도 고양이를 기른다. 어젯밤, 고양이가 뭔가를 바라봤다.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목을 길게 빼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울기도 한다. 누워있는 내 가슴 위를 건너뛴다.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다. 정말, 고양이가 무언가를 보고 있네, 하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을 떠올린다. 몇 번인가 내 가슴 위를 뛰어넘었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뛰어넘었다가 한다. 나는 대체 고양이가 뭘 바라보고 있는지, 고양이의 고개가 향하는 방향을 유심히 바라본다. 정말 고양이는 아무 것도 아닌 걸 바라보는 걸까? 가령 유령 같은 걸? 하지만 아니었다. 아주 작은 날벌레다. 그것이 천..
그 배들이 세계의 끝으로부터 온 것은 너의 아주 작은 소원까지도 들어주기 위한 것. -보들레르 '여행에의 초대' 중에서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다보면 반드시 이르게 되는 생각의 끝이 있다. 그건 지금껏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이다. 아니, 무엇을 잘못했다기보다는 ‘어떻게’ 잘못했는가, 그 일이 어째서 그런 잘못된 결과가 되었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대개 그 답을 찾아내는데, 이러저러한 방향으로 검토한 결과 내가 찾아낸 답은 꽤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는 내가 한 잘못들을 알게 된 것 같다. 다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일을 잘할 수 있는가 이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백 가지 잘못된 방법을 알게 된다고 해서, 한 가지 잘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일을 잘못하는 방법은 무한정으로 많을 수 있다.
도서관을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보도 옆 축대 위에는 벌써 개나리가 피어있었고 물에 젖은 흙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그리운 냄새가 났다. 버스가 오는 방향에서 여고생 하나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래 위 똑같은 진청색의 교복은 도저히 꾸미려야 꾸밀 수 없는 패션이었지만 몸의 균형이나 자세가 좋은 탓인지 제법 눈길이 갔다. 얼굴형은 다분히 남성적으로 각이 져 보였고 미인이라 할 만하지는 않았지만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눈이 깊어 보였다. 단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시선을 아래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녀 뒤쪽으로 똑같은 교복을 입은 여고생 네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일렬로 서서 보도의 전체를 차지했다. 먼저 그녀가 나를 지나쳤고 얼마 있다..
어제 밤에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졌다. 어느 미국 드라마에서 본 때문이었다. 일어나서 팬케이크 조리법을 인터넷으로 알아보려다 귀찮아져서 그냥 잤다. 오늘 낮 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방금 전에 인터넷으로 조리법을 찾아보았다. 밀가루, 설탕, 계란, 우유 또는 물. 이게 전부다. 팬케이크. 이게 전부라고? 물도 떨어지고 해서 슬슬 장보러 가야할 때가 되가는데 이번에는 장보기 목록을 작성해 볼 생각이다. 그날은 내가 팬케이크를 해먹는 날이 될 것이다. 어쩐지 장을 보고 와서 밀가루에 계란을 풀고 우유도 넣고 해서 팬케이크를 해먹는다고 생각하니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메이풀시럽을 곁들인다면 더 맛있겠지. 팬케이크. 그게 전부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아니라고 한다면, 가령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또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최근에 내가 만났던 여자들은 계속 여자 형제 밖에 없는 여자들이었다. 그 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본 건 아니고,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열차가 지하를 빠져나와 지상 구간에 접어들었을 때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 그러네, 자매들이었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몇 명중에 몇 명이 그랬는지를 밝힐 수는 없다. 어쩌면, 그건 거의 의미 없는 비율인지 모른다. 일종의 규정타석 미달이랄까? 표본자체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 점은 확실한데, 나는 그녀들이, 또 그녀가 여자 형제 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여동생, 언니 밖에 없다는 사실..
며칠 전에 내가 연기자가 된 꿈을 꾸었다. 아니 연기자가 되었다기 보다, ‘연기’를 하는 꿈을 꾸었다는 게 맞을 거다. 아무리 꿈속이라 해도,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나조차도 부끄러운 ‘연기 비슷한’ 어떤 짓을 하고 있었다. 왜 내가 연기자가 된 거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사람들이 내게 뭐라고 욕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굉장히 지독하고 불쾌한 꿈이었는데, 현실로 치자면 내가 외국의 호텔 프론트에서 더듬더듬 영어를 하는 상황과 비슷하겠다. (실제로 그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안다. 항상 그렇듯이 상대방은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내게 어떤 것을 요구했는데, 나는 도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가장 나빴던 건 내가 그 자리를 도망쳤다는 거다. 호텔은..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적, 스물여섯 일곱 살 때 사귀었던 여자는 무용을 전공했었다. 대체적으로 그녀와의 연애는 즐거웠던 걸로 기억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라든지, 나라든지, 또는 우리라든지 하는 이유가 아니라, 그녀도 나도 아직 젊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즐거운 연애를 하기에 적합한 나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어리지도, 너무 늙지도 않은. 그녀는 나보다 세 살(어쩌면 네 살일지도) 정도 어렸는데, 그렇게 스물일곱, 스물넷의 나이란 1,2년 연애경험을 가지고 결혼을 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어린아이처럼 환상을 품지도 않고, 반대로 서로에 대해 늙은이처럼 너무 따지거나 재지도 않고,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게 남아있음에도 그렇게 때문에 ‘잘 하면’ 행복해질 것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