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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물고기통신 111 - 소설이 될 수 있다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111 - 소설이 될 수 있다

물고기군 2008. 4. 7. 14:50

도서관을 나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보도 옆 축대 위에는 벌써 개나리가 피어있었고 물에 젖은 흙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코로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그리운 냄새가 났다. 버스가 오는 방향에서 여고생 하나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래 위 똑같은 진청색의 교복은 도저히 꾸미려야 꾸밀 수 없는 패션이었지만 몸의 균형이나 자세가 좋은 탓인지 제법 눈길이 갔다. 얼굴형은 다분히 남성적으로 각이 져 보였고 미인이라 할 만하지는 않았지만 피부가 유난히 하얗고 눈이 깊어 보였다. 단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시선을 아래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녀 뒤쪽으로 똑같은 교복을 입은 여고생 네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일렬로 서서 보도의 전체를 차지했다. 먼저 그녀가 나를 지나쳤고 얼마 있다 네 명의 여고생이 나를 피해 대오를 흩트렸다가 지나쳐서 다시 본래대로 대오를 맞추며 걸어갔다. 버스가 왔고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보도 쪽 창가에 앉아 아까의 혼자 걸어가는 여고생을 눈으로 찾았다. 이번에는 버스를 탄 내가 그녀를 따라 잡아서 지나쳐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별다른 표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지도 않았고, 기쁘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학교를 나와 집으로(또는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나는 시험삼아 혼자 걸어가는 여고생이 얼마나 더 있는지 찾아보았다. 처음 보았던 그녀를 제외하고 한 명을 더 찾아냈다. 하지만 그 한 명은 어쩐지 친구와 함께 걸어오다가 길이 갈라져 혼자 나머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학교에서 꽤 멀리 떨어진 거리였다.

버스는 그 길의 끝까지 가서 교차로에 이르렀고 건너편 보도 쪽에 커다란 선거 현수막과 그 앞에 주황색 단체티를 맞춰 입은 예닐곱 명의 선거운동원들이 보였다. 그들은 젊은이들이었는데 노래에 맞춰 응원단 같은 율동을 하고 있었다. 버스는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했고 나는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살필 수 있었다. 즐거워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었다. 다만 조금 지쳐보였다. 얼굴은 붉어졌고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예상보다 더 어려보이는 친구도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건지 그렇게 보일 뿐인지 알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걸어가는 여고생과 주황색 단체티를 입은 젊은 선거운동원 사이에 무슨 연관 지을 만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굳이 연관 지으려고 한다면 그건 언제나 가능한 일일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이 될 수도 있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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