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01/10 (12)
시간의재
"미안한데, 이 옷 좀 벗을게" 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여자는 실내가 더워서 겉옷을 벗는 것까지 나에게 물어보는 것일까? 여자는 모자가 달린 두꺼운 회색 후드 티를 벗었다. 안에는 가슴부근에 영문 로고가 쓰여있는 얇은 면 티를 입고 있었다. 무슨 색이었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내의 어느 한 술집에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새벽에 영업을 하는 술집이 대개 그러하듯이, 조명은 어둡고 자리는 좁다. 여자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그게 언제였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술집에, 그 시간에 우리가 자리를 마주하고 앉게 된 거지? 나는 기억의 선후관계를 하나하나 따져본다. 여러 가지 기억들이 혼동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벗었던 회..
다시 게을러졌다. 술먹자.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김화영, 문학동네, 1998 내가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군에 있을 때였다. 나는 군대에서 그의 소설 '청춘시절'을 읽었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책이었는데, 책의 표지가 너무 촌스러워서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청춘시절'이라니. 하지만 군대에서의 나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내가 쓴 최근의 소설에서, 나는 '청춘시절'이라는 단어를 기어코 썼는데, 그것이 모디아노의 작품에서 비롯된 단어인지, 아니면 실제로 내가 군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 스스로 썼던 단어인지, 이제와서는 잘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날 밤, 어떤 한 시절이 ..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강원도의 힘'에 대해 들었다. 대개는, '참 좋다'는 쪽이어서, 그러면 나도 꼭 한 번 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죽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기회가 닿으면, 가령 잊고 있다가 우연히 비디오 샵에 꽂혀있는 여러 영화들 중 그 제목이 눈에 쑥 들어와도, 뽑아들지 못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누구로부터 아무 얘기도 듣지 않았는데도, 선뜻 집어 들어 본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가 나를 실망시켰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고,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두 번쯤 보았던 것 같다. 감독의 전작 영화에 대해 실망한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추천을 받았음에도, 어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