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고등학교 시절, 문득 생각난 건데, 내가 제일 좋아했던 시간은 바로 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저녁 10시까지의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10시 반, 나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다. 부엌에 들어가 차가운 물 한잔을 벌컥 벌컥 들이마시고 방으로 들어간다. 하루가 끝났다. 별로 특별한 하루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어제나 아님 내일과 잘 구별할 수도 없는 매일 같은 하루지만 어쨌든 끝났다. 나는 불을 끄고, 오토 스톱이 되는 카세트 데크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어두운 방안에서 창 밖을 하릴없이 내다보며 담배 한 대를 피운다. 겨울이어도 환기를 위해 꼭 창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밤의 공기가 계절의 냄새를 방안에 가득 채운다. 이불에 누워 잠이 들 때까지... 때로는 한 시간이 넘도록 잠이 들지 못하..
... (삭발은 아니다. 맞는 모자가 없어서)캬오~
새벽 두 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바닥으로 내리고 눕는다. 불을 끄고 술기운을 또렷하게 느끼면서 수화기를 든다. 얼마나 취해 있는 거지? 한 70정도. 몇 잔을 더 마시면 필름이 끊길까? 그러나 오늘밤은 이걸로 끝이다. 나는 더 이상 마시지 않을 거다. 아직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을까? 이 번호가 맞나? 어떻게 된 거지. 완전히 취했군. 100 퍼센트 취했어.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다니. 또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고 있다니.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약 두 달간 대대 상황실에서 근무를 했던 적이 있다. 그 후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서 결국 나는 다시 중대로 내려오게 된다. 육체적으로는 분명 상황실 근무가 천국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중대 쪽이 훨씬 편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대대 상황실의 근무란 게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한없이 한량했던 게 사실이다. 대대장과 작전장교가 상급부대로 들어가서, 눈치볼 사람이 없는 날은 더욱 그렇다. 오전에는 사다리를 타서 먹을 걸 사온다. 따근하게 데운 만두와 꼬꼬볶음이 주메뉴고 음료수와 과자까지 한 박스 가득 담아온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는 다들 나른해져서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짬밥이 되는 고참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곤하게 잠을 잔다. 상황실에서 나와 왼쪽으로 십 미터쯤 걸어가 ..
쓸데없는 동작이 많다는 언수형의 지적이 옳았다. 아니,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옳은 것처럼 느껴진다. 아닐 지도 모르고. 그래서 동작을 뺐다. 다시 읽어보니 조금 나아진 듯 했다. 아닐 지도 모른다. 내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소설은 - 콩트나 엽편까지 합쳐서 - 열 편이 넘는다. 물론 개중에는 소설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힘든, 엉성한 문장들도 있다. 그래도 열 편이라면, 적지 않은 숫자다. 게으름을 피웠든, 치열한 의식이 없었든 그 문장들을 쓰는 동안, 나는 그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왜 아직도 나는 소설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걸까? 왜 소설을 쓰는지, 또는 소설이란 게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할 수 있다. 비록 틀린 말일지라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
N.O.X 라는 그룹이 있다. 별 대단한 그룹은 아니다. 남녀 혼성그룹으로 지금의 코요테나, 뭐 기타 시시껄렁한, 기획사에서 대충 얼굴 반반한 남녀를 길에서 주워와 급조한 듯한, 엉성한 그룹이다. 타이틀곡은 댄스곡, 음악적 경향 같은 건 없고, 앨범에는 감미로운 발라드도 몇 곡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1집을 낸 지가 이제 2년이 넘었건만, 2집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번 판을 내봤더니 잘 되지 않아서 기획사조차 포기한 그룹인 것이다. 이 그룹이 그래도 공중파나 케이블 방송에서 간혹 얼굴을 비치던 시기, 대개 활동시기라고 부르던 때는 1998년 여름이었다. 타이틀곡은 '미치도록'이었다. 그래도 노래방에 가면, 그 곡이 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앨범을 사곤 한다. 뭐라고 할까,..
아침에 사당동에 갈 일이 있었다. 아침이라고 해봤자, 11시도 넘어서지만. 전화로 대충 약속장소의 위치를 설명들었기 때문에, 길을 헤메기를 이 삼십분. 육교를 건너라고 했는데, 대체 육교는 어디 있는 거야? 결국 육교를 찾아내고, 약속장소인 제과점을 찾아냈을 때, 나는 처음부터 엉뚱한 방향에서 헤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반대방향에 택시가 나를 내려다 준 것이다.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고, 심부름할 물건을 건네받고 다시 길에 남아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그러고보니 이곳은 내가 처음 와보는 동네다. 햇살은 따갑고, 공기는 무덥다. 발 아래로 뜨거운 지열이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조금 더 걸어가보기로 했다. 넓다란 공간의 주유소를 지나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