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찾는 책이 없어서 온 방안을 뒤지다 계획에도 없는 방 청소를 하게 되었다. 상자 안에는 참 많은 것들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조금 가슴이 아파졌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가라는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옳음은 언제나 누구의 옮음이고, 그름은 언제나 누구의 그름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인정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인정할 수 없는가 라는 것이다. 요컨데,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를 물어왔었다. 감히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내 자신이 언제나 '적자'나 '부적자' 둘 중의 하나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아니야, 라고 말하면 누군가는 꼭 내 발 밑을 가리키며, 너는 '적자'이기 때문에, 또는 너는 '부적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충고한다. 그 상황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누구도 다리를 땅..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정말로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모르는 게 많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벌써 스물 아홉 살이고,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라고, 아니 학생도 아니라고 부끄러워한다. 저녁 TV에서 부자들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어느 소설에서 부자는 마치 휘발유가 필요 없는 인공위성과도 같아서, 그들이 부자로 계속 있기 위해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결국 그 얘기였다. TV 속의 부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평일 낮에 골프장이 만원이다. 외제차를 몰고 고급 레스토랑이나 유흥업소를 드나드는 나이 어린 녀석들의 모습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헬기에서 촬영한 강남의 고급 주택가의 모습은, 우리나라가 아닌 줄 알았다. 바깥에서는 담이 높아서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채널을 바꿨더니, 실직..
필통을 잃어버렸다. 과사무실에 두고 왔겠지 생각했는데, 없다. 그 필통은 꽤 오래된 것이다. 그녀를 알게 되고 두 달 뒤, 나는 약 6개월 동안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 날 나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6개월은 꽤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막 사귀기 시작한 즈음엔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내가 군대를 갈 때도 그랬다. 어떤 면에서 나는 그런 걸 마음 깊이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나 어딘가로 가기 전에, 여자를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금방 끝날 관계만을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종로였을 거다. 우리는 형광등 불빛이 환한 햄버거 집에 있었다.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늘어놓다가, 필통이 없어, 라고 말했다. 필통뿐만 아니라, 펜도 뭐도 없었다. 여자는..
...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시청의 층계로 나갔다. 선선하고 맑은 날씨였다. 저 멀리까지 보였다. 하지만 벨마가 간 것만큼 멀리까지는 아니었다. - 레이몬든 챈들러 [안녕, 내사랑] 마지막 문장 ps : 부연 설명을 하자면, 위에서 '나'는 그 유명한 '필립 마로우'. '벨마'는 클럽에서 일하다 남자친구를 배신하고 신분을 감추고 늙은 백만장자의 부인이 된 여자. 감옥을 갔다온 남자친구가 벨마를 찾으러 옛 클럽을 찾아간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소설의 마지막, 결국 남자친구는 벨마를 붙잡는다. 그러나 벨마는 남자친구를 권총으로 죽이고 도망을 친다. 이것으로 일단 소설을 일단락된다. 그리고 그녀는 석달 뒤, 어느 클럽에서 경찰에게 붙잡히고, 붙잡힌다 해도 그녀..
분명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젊다든지, 젊지 않다든지 하는 것들이 온전히 마음에달린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마모되었고, 닳아 있다. 어떤 것도 마음 깊이가라앉지 않고, 오래 머물지 않는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의 방향을 알지 못하고,코 속을 싸하게 하는 공기의 냄새를 맡지 못한다. 피부는 더러워지고, 몸은 느슨해진다. 「나에게는 찾고 있는 것이 있어요. 뭐였더라, 그게 생각나지 안아요. 그래도찾고 있어요.」 이건 전 번에 말했던 소설의 한 구절이다. 문득 다시 생각났는데, 왜냐하면 나자신,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게 아니라, 내가갖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기 때문.
오랜만에 아침에 도서관을 찾았다.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따져보면 거진 2년이 넘었다. 군대를 제대한 대개의 예비역들이 그러하듯이 한동안 어울리지도 않는 부지런을 떨어서, 내가 6월에 제대했으니까 그해 10월까지 4개월간, 친구의 차를 타고 아침마다 도서관을 찾았다. 성실했던 친구 탓에 거의 매일같이 빼놓지 않고 출근했었는데, 도착하는 시간은 여덟 시 반쯤으로, 우리는 마땅한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고 항상 커피를 마시러 바깥으로 나왔다. 그 해 나는 스물 여섯 살이었다. 그렇다해도 우리 둘 다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과장했으며, 그 심정은 절실했었다. 그리고 이제 즐거운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인사성이 밝은 후배녀석이 도서관 앞 돌계단에 앉아 있던 우리를 향해 알은 체를 할 때면, 새삼 ..
어째서, 어떻게, 어쨌거나, 나는 또 너무 많은 말을 했다. 열병처럼 말이 나를 통과하고, 나를 쓰러뜨리고, 나를 커다란 구멍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그 구멍을 눈으로 보고, 그 속에 손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나는 알 수 있다. 어느 날에는 무척이나 술이 맛있고, 어느 날에는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쓰다. 마치 그런 것처럼, 나는 알 수 있다. 아, 또 그 시간인가.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자기모멸의 시기, 죽음 같은 침묵이나, 겨울잠의 시기. 불가항력적이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단지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이다. 한 번 지나가면 또 얼마간은 괜찮다. 궁극적인 해결책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의 어떤 시도도, 결과적으로 사태의 해결에 도움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