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 저희 집은 이사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단 한 번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문화촌'이라는 동네에서, '반포'로의 이사입니다. 제가 혼자서 버스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즘에, 지나가는 버스의 노선 안내판에서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문화촌'이라는 이름이, 실제의 지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 대체 뭐로 생각했을까요? 아직도 저는 문화촌의 서울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게 강북인지, 강남인지, 무슨 구인지, 또는 문화촌이 바로 동이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문화촌에 관한 기억은 반쯤은 조작된 기억입니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
빌리 조엘의 노래 중에 '업타운 걸'이라는 곡이 있다.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 이 곡을 자주 듣게 되었다. 아니, 최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 반년이나 일년 동안이다. 일주일에 세 번, 하루 두 시간 이상씩 차를 운전하며 라디오를 듣다보니,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닐 테지만, 이 노래가 나온 지 오래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굳이 화제로 삼지 않을 이유도 없다. 요컨대 최신유행곡과는 다른 것이다. 나는 팝송에 대해선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곡이나 가수들은, 말 그대로 누구나 알법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등. 그런데 빌리 조엘에 대해선, 조금 양상이 다른 데, 나는 그의 이름을 재수 때 알게 되었다. 그렇다해도 그의 음악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이름과 곡명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상..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인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한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나는 죽음을 상대로 싸움을 해왔어.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잇는 다툼 중에서도 가장 맥빠진 다툼이지. 그 다툼은 어떤 막연한 회색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발 밑에 딛고 설 땅이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며, 구경꾼도 없고, 소란도 없고, 영광도 없고, 승리를 향한 커다란 욕구도 없고, 패배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없고, 미지근한 회의로 가득한 그 진저리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많은 믿음도 없이, 또 우리 ..
조셉 콘래드, "암흑의 핵심", 이상옥, 민음사, 1998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7권에 속하는 책이다. 표지에 작가의 사진인지 초상화인지 모를 것이 그려져 있는데, 눈두덩이 쑥 들어가고 코가 크고 콧날이 오뚝한 게, 퍽 남성적으로 잘 생긴 얼굴이다. 코 아래부터 조명 탓인지도 모르지만, 검은 수염이 무성하다. 시선은 오른편 상단을 향하고 있는데, 노려보는 듯한 강한 눈빛은 아니고, 그저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이다. 마치 상갑판의 조타실에서 먼 바다를 바라보듯이. 이 책은 사실 꽤 오래 전에 구입한 책인데, 최근에야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었다. 처음 도입부가 - 100년 전의 소설인 탓인지 조금 어설프다고 느껴졌지만 읽어나갈수록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힘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나 자신의 독서경향을 말하라 한..
소설란에,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썼던 소설 '여분의 죄'를 올렸습니다. 왜 갑자기 올리느냐,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올리지 않은 게, 순전한 실수니까요. 맞춤법을 엄청나게 틀렸더군요. 하여간, 갑자기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지금껏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고등학교 시절의 단짝 친구 한 놈뿐입니다.
요즘 들어 내가 음악을 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째서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그 흔한 피아노학원 한 번 안 보내주셨을까? (미술학원, 속셈학원 어떤 데도 저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물론 원망이 아니라, 다분히 궁금해지는 대목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제게 유일한 시간 보내기는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여러 목소리를 내며 방안에서 놀거나, 집 이곳 저곳에 널려 있는 아무 책이나 뽑아서 읽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후가 되면 티브이를 끼고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대단한 음악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을 했다해도 저는 역시 남의 눈에 띄는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제가 바라는 건 단순히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인간이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멜로디를 만들고 화음..
누군가를 경멸하고 싫어하는 것은 정말로 쉬운 일입니다. 적어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비하면 백만배 천만배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경멸하고 싫어하는 것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회복할 수 없는 인생의 소모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한없이 어두워집니다.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어두운 꿈밖에 꾸지 못합니다. 더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꿈조차 꾸지 못합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도 문장을 두려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내 두려움은 이런 것이었다. 좋은 문장이란, 진짜 소설이란, 문학이란 나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선택된 인간이거나, 훨씬 이전부터 꾸준한 숙련을 통해 문장을 다듬은 인간만이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런 인간들에 비하면, 내 문장은 쓰레기처럼 여겨졌다. 쨉이 안됐다. 이미 나는 늦었거나, 처음부터 시작하면 안되었다. 나는 단지 까불고 있을 뿐이었다. 완벽한 두려움이 나를 꽉 붙잡았다. 대학교 4학년 여름의 일이었다. 두려움을 이겨낸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아직도 내 안에 있다. 단지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뿐이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그 두려움이 나를 붙잡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