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물고기통신 25 - 이사의 기억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25 - 이사의 기억

물고기군 2001. 12. 28. 19:31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 저희 집은 이사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단 한 번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문화촌'이라는 동네에서, '반포'로의 이사입니다. 제가 혼자서 버스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즘에, 지나가는 버스의 노선 안내판에서 '문화촌'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문화촌'이라는 이름이, 실제의 지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 대체 뭐로 생각했을까요? 아직도 저는 문화촌의 서울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게 강북인지, 강남인지, 무슨 구인지, 또는 문화촌이 바로 동이름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문화촌에 관한 기억은 반쯤은 조작된 기억입니다.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앨범의 바랜 흑백사진을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의 기억인지, 아니면 그저 사진을 보고 제멋대로 상상해낸 기억인지는 잘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집이 이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다른 곳에 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른 곳도 집에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었습니다.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 군대에 갈 때까지, 저는 죽 한 동네에 살았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이번에도 역시 이사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은, 아직 그대로 저희 집으로 남아 있습니다. 설명하자면 꽤 복잡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런 탓에, 제게는, '이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습니다. 이삿짐이나, 이사하던 날, 이사한 집, 어떤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 비슷한 기억으로, '도배하던 날'이 있습니다. 전혀 비슷하지 않은가요? 하여간, 도배를 하기 위해 방안의 모든 가구를 마루로 들어냅니다. 마루는 실로 놀이기구가 가득한 놀이방이 됩니다. 밤에 불을 끄면, 술래잡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로가 됩니다. 그리고 방은 텅 빕니다. 전혀 다른 방이 됩니다. 어떻게 단순히 그 안의 가구를 들어내는 것만으로, 그렇게 전혀 다른 방이 될 수 있는지 신기합니다. 도배지가 얼추 마르기 시작하면 그 텅 빈 방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저는 그 방에 이불과 카세트데크만 달랑 들고 들어가서 이불 위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는 했습니다. 도배지의 냄새와, 어쩐지 높아진 것 같은 천장, 기묘한 소리의 울림 등, 그 방의 정경을 저는 아주 잘 기억합니다. 그 기억은 제 몸 속에 스며있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서른 살이 되는 저로서는, 문득 '이사'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 제 인생의 결손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단 한 번이라도, 이사를 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이전의 것들을 모두 버리고, 그 제로의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은 언제나 두려운 법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사가 두렵습니다. 어떻게 제로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이사를 다니며 삽니다. 이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제 쪽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제 저도 이사를 해야겠죠. 한없이 두려운 일이지만, 주사를 맞는 일처럼, 막상 하고 나면 또 아무 일도 아니겠죠.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고기통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고기통신 27  (0) 2002.01.05
물고기통신 26  (0) 2002.01.01
물고기통신 24  (0) 2001.12.20
물고기통신 23  (0) 2001.12.17
물고기통신 22  (0) 2001.12.1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