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3년,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소설 문학회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스물 일곱 살에서 스물 아홉 살까지 말이죠. 그리고 이제 저는 서른이 됩니다. (사실 서양식으로 세면 아직 스물 여덟 살이지만 말입니다.) 문학회에 있으면서 참 많은 일들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좋았던 일도 있었고, 나빴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 3년 동안, 내내 함께 했던 사람도 있었고, 잠깐 문학회에 들어왔다가 무슨 이유인가로 금방 나가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하다가, 어느 순간 훌쩍 떠나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밑으로 두 기수가 더 들어왔습니다. 그 동안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문학회에 남아 있었는데요, 이제와 생각하면 - 물론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 분명 그 이유 중의 하나는, ..
지금껏 폴 오스터의 소설은, "달의 궁전"부터 시작해서, "우연의 음악", "거대한 괴물", 그리고 이번 소설 "동행"까지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순서가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달의 궁전"을 먼저 읽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달이라는 '사물'에 관심이 있었고, 또 그 작품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아무튼, 매번 읽을 때마다, 그것이 작은 감탄이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큰 감탄이든, 분명 감탄할 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런 종류의 감탄이었다. '야, 이렇게 소설을 쓰네. 어떻게 여기서 여기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지?'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소설을 읽을 때면 나의 관심은 온통 문장에만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마지막에 써라!' 간혹 가다, 마지막 문장을 처음에 쓰거나, 중간에 쓰거나, 또는 다 쓰고 나서 마지막 문장만 슬쩍 바꾼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안돼요, 안돼, 그것만은 안돼요. 서두르지 마세요, 순서대로 차근차근.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믿거나 말거나 물고기 글짓기 교실'은 계속됩니다. 죽~~~~
어제에 이어, 오늘은 소설을 쓸 때의 주변 환경에 대한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이런 얘기는, 어느 글짓기 교실에서도, 어느 유수한 문예창작학과 교실에서도, 심지어 우리의 소설창작시간에서도 언급되지 않은, 일종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소설 작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가끔 왜 이런 걸 사람들이 언급하지 않을까 궁금해지는데, 그때마다 결론은, 그들이 자신의 학생들에게 그 비기를 숨기고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최근에야, 소설을 쓸 때의 주변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그 덕으로(?), 아마 소설을 더 잘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하게 제가 소설을 쓸 때, 주변이 어떤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강의를 대신할까 합니다. 먼저 제 책상에는 책 받침대가 있는데, 그곳에는 ..
만일 누군가 지금 소설을 쓰고 있거나, 쓰려고 한다면, 혹은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제 말을 깊이 명심하십시오. "완성의 꿈을 버리십시오." 소설을 쓴다는 건 결코 그 완성이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완성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는 자세가 좋은 소설이 나올 가능성을 높여줍니다. 소설을 끝내는 힘은, 완성의 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안에서 충분하게 말했는가, 더 이상 할 얘기가 남아있지 얺는가 라는 자기 납득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언제나 미완입니다. 누구도 완벽하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완성의 유혹을 떨치는 일, 언제나 마음 깊이 명심하십시오. 지금까지 '믿거나 말거나 물고기 글짓기 교실'이었습니다.
삶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진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엄연한 실존의 핵심에 더 바싹 다가갈 수 있는 법이다. - 폴오스터 "동행" -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쓴다' 이 말을 책상 앞에 붙여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