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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물고기통신 21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21

물고기군 2001. 12. 14. 16:25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도 문장을 두려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내 두려움은 이런 것이었다. 좋은 문장이란, 진짜 소설이란, 문학이란 나 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선택된 인간이거나, 훨씬 이전부터 꾸준한 숙련을 통해 문장을 다듬은 인간만이 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런 인간들에 비하면, 내 문장은 쓰레기처럼 여겨졌다. 쨉이 안됐다. 이미 나는 늦었거나, 처음부터 시작하면 안되었다. 나는 단지 까불고 있을 뿐이었다. 완벽한 두려움이 나를 꽉 붙잡았다. 대학교 4학년 여름의 일이었다. 두려움을 이겨낸 것은 아니다. 두려움은 아직도 내 안에 있다. 단지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뿐이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그 두려움이 나를 붙잡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그때가 되면, 나는 훨씬 오랜 시간동안 그 두려움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두려움에 굴복할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때까지, 적어도 다시 한번 그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단 몇발짝이라도 앞으로 걸어나가면, 거기에는 출구가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낌새도 없지만, 아마, 애써서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면, 그 나아간 만큼, 가까워질 거라 생각한다. 내게 있는 건 그런 보잘 것 없는 확신이다.

+) 방명록에 '봄'이라는 후배가 쓴 글에 대한 답글입니다. 문득 다시 읽고 되새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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