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그리스 사람들은 부고를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누군가 죽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열정이 있었는가?’ 요즘 카페를 운영(?)하면서 여러 사실들을 새삼,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는데 오늘 문득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열정’과 ‘수완’의 문제입니다. 만일 사람을 뽑는데, 한 사람에게는 수완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열정이 있다면, 과연 누구를 뽑아야 하는가?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수완과 열정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을 뽑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그런 경우는 거의 드물고(왜일까요?), 문제를 아주 단순화시켜서 대답하라고 한다면, 저는 열정이 있는 사람을 뽑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정과 수완, 둘 다 일을 하는데 있어, 또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덕목이지만, 그래도 ..
이야,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잘들 지내고 계시겠죠.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역시 오랜만에, 정말 근 두어 달 만에 밤을 꼴딱 새고 말았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잘 모르겠군요. 특별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창 밖으로 벌써 하늘이 희뿌옇게 밝았습니다. 이제 막 방의 전등을 껐습니다. 뭐랄까. 제가 처음으로 밤을 새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저는 그날을 잘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때 제가 밤을 샜던 이유는 단지 밤을 샌다는 게 뭔지 궁금해서였습니다. 밤마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밝아 있더라, 그렇다면 제가 잠을 자던 그 시간은 대체 무엇일까, 뭐, 이런 게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졸린 눈을 억지로 부비면서 형과 카드놀이를 하면서 새벽까지 버텼습니다. 근데 형은 왜 그날 밤을 샜을까요..
안녕, 문희야. 참 오랜만에 편지란 걸 써본다. 잘 지내고 있겠지.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벌써 서른이 되었다, 나는 말이야. 널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직 스물일곱 살이었는데. 요컨대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얘기야. 오늘 널 닮은 여자를 봤어. 요즘 나는 카페에서 일을 하는데, 처음 그 여자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정말로 너인 줄 알았지 뭐야. 눈이 크고, 눈 사이가 넓은 게 너와 쏙 빼닮은 여자였어. 미인이었지. 물론 너보다는 조금 살이 있었지만 말이야. 시간이 흘렀으니까,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잖아. 하지만 너는 아니었어. 주방에서 음료를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내내 그 여자를 쳐다봤어. 다행히도 내게 보이는 자리에 그녀가 앉았던 게지.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였고, 가르마를..
좋은 것과 더 좋은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운이 나빠서 덜 좋은 것을 선택하게 된다 해도, 그건 나름대로 괜찮다. 에이, 다른 게 더 좋았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반대로 나쁜 것과 더 나쁜 것,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악이다. 물론 운이 좋아서 덜 나쁜 것을 선택하게 된다면, 위안이라도 삼을 수는 있다. 다행이네. 더 나쁜 것이 아니니 말이야. 하지만 씁쓰레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전혀 행복할 수 없다. 주머니에 흰 공과 검은 공이 들어있다. 편의상 흰 공을 ‘좋은 것’, 검은 공을 ‘나쁜 것’이라고 해보자. 사람들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공을 골라야 한다. 운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흰 공을 뽑아든 사람은 행복할 것이고, 검은 공을..
지금의 나를 떠올리면 스스로도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일이라 생각되지만, 한창 춤에 재미를 붙였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의 춤은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그냥 춤이다. 나이트 같은 데서 추는 춤 말이다. 그건 재수시절이었다. 1992년.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한창 춤에 재미를 붙였던 때로부터 나는 열 살이나 더 나이를 먹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1992년의 ‘락 카페’라면 금방 어떤 분위기의 춤추는 곳이었는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설명하자면, 그곳은 얼핏 보면 일반 카페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럴만한 시간이 되면 시끄러운 댄스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특별히 마련된 플로어가 없이 앉은 자리 근처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또는 플로어라 할 만한 중..
기분이 우울할 때는, 진공청소기를 돌리세요. 진공청소기가 없다고요? 그럼, 사세요. 10킬로가 넘는 볼링공도 들어올리는 강력한 파워의 진공청소기도 십 몇 만원 밖에 안한답니다. 게다가 카드로 구입하면 3개월까지 무이자예요. 대신 코드는 긴 걸로, 흡입구의 브러쉬는 180도 회전이 가능한 걸로. 안 그러면 오히려 짜증만 더해질지도 몰라요. 자, 준비가 됐으면 전원을 켜세요. 소리가 들리나요? 위이이잉. 구석구석 묵은 먼지를 힘껏 빨아들이는 거예요. 부스스한 머리라도 상관없고, 속옷 바람이라도 괜찮아요. 창문을 열고, 음악을 크게 틀고, 진공청소기를 끌면서 춤이라도 출 수 있다면, 또 그렇게 하세요. 바퀴가 잘 굴러갑니까? 먼지가 빨려 들어가는 게 보이나요? 기분이 어때요? 알겠죠? 기분이 우울할 때는, 진..
최근에는, 그러니까 ‘톨게이트’ 이후, 제가 쓴 소설을 되풀이해서 읽지 않습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 몇 번 읽기는 합니다만, 예전처럼 열심히 읽지는 않습니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읽었던 걸까요? 뭔가 미진한 얘기의 부분을 보충하고, 잘못된 문장, 또는 껄끄러운 문장들을 수정하기 위해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입으로 발음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소설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는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별로 재미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의 어떤 부분, 분명 엉성하고 못난 부분을 깎아내는 작업이었겠지만, 때로 그렇게 깎아내서 남게 될 어떤 것이, 과연 나인가..
우리 동네에는 빵 가게, 또는 제과점이 두 군데 있다. 그리고 그 두 군데의 제과점, 또는 빵 가게는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집에서 출발해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갈 수 있는 제과점의 이름은, 아마 ‘프랑세즈’ 제과점이고, 길을 건너야 하는 곳은 TV에도 심심찮게 광고가 나오는 ‘파리바게뜨’다. 그 광고의 위력 탓인지, 내가 자주 이용하는 곳은 길을 건너야 함에도 불구하고 ‘파리바게뜨’였다. 광고효과는 무시할 게 못된다.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도라고 하는지, 브랜드 파워라고 하는지, 아니면 네임 벨류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신뢰가 간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다지 빵을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먹지만, 굳이 찾아서 먹는 타입은 아니다. 그런데, 이게 라면이나 자장면과 비슷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