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십년. 뻔한 얘기 같지만, 십년이란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특히 그것이 한 인간의 이십대 시절일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는 잔디밭이 넓은 어느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 공원에 들어서면서 나는 그녀에게 뭐 좀 마시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따뜻한 커피. 나는 공원 초입에 있는 조그만 간이매점에서 직접 타 주는 커피 두 잔을 산다. 그것은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녀가 얘기를 끝마쳤을 때, 그것은 약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십년의 얘기를 두 시간동안 한다는 것이, 짧은 건지 긴 건지 알 수 없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 그 평균값을 구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십년이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 ..
제가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그것이 저의 잘못도, 당신의 잘못도 아니란 점이예요.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어요. 누가 그것을 책임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모두가 책임지고 싶어 하지만, 또 아무도 책임질 수 없죠. 잘못은 사라지지 않아요. 아무에게도 죄가 없지만, 모두가 벌을 받고 있어요. - '손톱깎이'중에서
최근에 몇 편의 소설을 실패하면서, 품게 된 생각이 하나 있다. 실제로 그것이 옳은 생각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있었던 이야기’가 단순히 작가 자신의 한정된 삶과, 한정된 경험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다고 해서, 그 소설 자체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다고 해서’, 그 소설이 ‘있었던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있었던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립하는 것도 아..
나는 소설이라는 장르에는 관심이 없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긴 문학이나, 소설도 나한테 관심을 가진 건 아닐 테지만, 또한 내 관심사 따위야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을 테지만, 일일이 그런 걸 신경 써서야 이렇게 문장을 쓸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내가 예전에 썼던 문장들, 소설이든 게시판에 올렸던 짧은 글이든, 읽다보면 스스로도 참 한심한 소설(문장)을 썼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부 다 그런 건 아니고, 개중에 몇 개는 지금 보아도 참 대견스럽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부럽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나는 갑작스럽게 내 주변의 무언가가 달라지는 걸 아주 싫어했었다. 나는 그것이 분명 영원히 그대로 있을 거라고 여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그것이 그렇게 계속될 거라고 여기고 있었나 보다. 가령 할머니.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동네 놀이터의 미끄럼틀. 옆 동에 살던 쌍둥이 소녀. (내가 알던 쌍둥이들은 어째서 다들 그렇게 예쁘고 잘 생겼을까?)최근에 주민등록증을 수령하기 위해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살았던 동네에 갔다. 내 주민등록지는 아직도 그 동네로 되어 있다. 단독세대주란 제목으로 말이다.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으로 많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동네는 여전했다. 미끄럼틀도 그대로였..
최근에 쓴 문장 중의 하나. ‘많은 구름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쓸 때는 잘 몰랐는데, 며칠이 지난 지금, 문득 다시 떠올랐습니다. 바로 지금 말입니다. 방 안에서 담배를 찾다가, 아까 집으로 오는 길에서 사는 걸 깜박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 제 머리 속에는 파란 하늘이 있고, 그 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구름이 있습니다. 구름은 그렇게 서둘러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하여튼 그것은 깜짝 놀랄 만큼 파란 하늘이고,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구름입니다. 참 흐뭇한 풍경입니다.
만일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것은 원인이 되는 걸까, 목적이 되는 걸까? 그때 나를 이끄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앞인가? 뒤인가? 가령, 예를 들어서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꽃을 선물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를 사랑하고 싶어서, 또는 그녀를 얻고 싶어서일까? 별 차이가 없다고? 아니다. 그것은 내게 굉장히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생각해보라. 그녀가 꽃을 거절한다면? 그때 내가 보낸 꽃은, 내가 치룬 노력은, 과연 뭐가 되는 걸까? 내가 그 일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만 하는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누운 채로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방 안은 조금 어두웠고, 오디오의 패널은 주황빛이었습니다. 거기에 라디오의 주파수가 써 있습니다. 제목도 가수의 이름도 모르지만, 귀에 익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몸을 비스듬히 일으켜 팔로 머리를 괴었습니다. 눈을 감았다가 잠시 후 다시 떴습니다. 어젯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해야겠다고 다짐한 일을 기억해냈습니다. 그건 손톱을 깎는 일이었습니다. 손톱을 깎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한 십 분? 오 분? 손톱을 깎고 나서 그것이 다시 깎아야 할 때까지 자라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요? 일주일? 이주일? 대체 누가 그것을 일일이 따져보고 기억하고 있을까요? 손톱은 어느 새 자라있고, 우리는 그것을 아무 감흥 없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