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보기 (466)
시간의재
랄프 루드비히, "쉽게 읽는 칸트 - 순수이성비판", 박중목, 이학사, 2000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된 건 1781년이다. 재판이 1787년으로 우리가 현재 대개 읽게되는 번역본은 재판이다. 그러니까, 200년도 훨씬 전의 책인 셈이다. 200년도 훨씬 전의 인간이 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200년도 훨씬 전의 인간의 사유를 읽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 시절 그(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원전을 읽기 전에, 입문서를 먼저 훑어보는 게 과연 옳은지 그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아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로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신경 쓰지 않는다. 기회가 닿으면, 입문서를 읽게 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원전을..
어쩐일인지, 요즘은 주말마다 집에서 '뒹굴뒹굴'하게 된다. 요즘이라고 했지만, 언제 주말에 바빠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오래되었다. 뭐, 그게 고통스럽다거나 비참하다는 건 아니다. 인생이란 건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아니 오히려 한가한만큼 즐거운 법이니까. 아무튼, 케이블 TV를 벗삼아 하루 종일 지내다 보면 뜻밖에 멋진 영화를 보게 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케이블 TV라는 건 마치 라디오와 같다. 같은 노래라도, 일부러 직접 골라서 듣는 것보다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될 때 더 감흥이 더 크다. 막 고추와 햄을 송송 썰어넣은 특식 라면을 끓여먹고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문득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가 눈에 잡혔다. 제목은 '서유기'. 근데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
레이몬드 카버,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 집사재, 1996 나는 카버의 소설에서 많은 것, 스타일과 방법 이상의 무언가를 배웠다. 그는 다른 누구와도 다르다. 그가 남긴 그 공백을 대신 메우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불가능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위의 말에서, '카버'를 '하루키'로 바꿔놓으면, 그것은 어쩜 나의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내가 하루키를 처음 알게된 건, 고 3내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녀석 때문이다. 정확한 문맥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는 문득 '상실의 시대'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병'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바로 그때 나는 하루키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너는 마치 어떤 소설의 여주인공이 걸린 말찾기 병에 걸린 것 같..
아직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개봉되지도 않은, 오시이 마모루(Mamoru Oshi) 감독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는 뜻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1996년 미국과 영국에서 개봉되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영화적 완성도를 인정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후 제작된 뤽 베송의 "제 5원소"나,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가 [공각기동대]의 여러 장면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각기동대]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영향관계를 따지자면 [공각기동대] 또한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블레이드 런너]가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물..
미야자키 하야오, "이웃집 토토로", 지브리, 1988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를 보고 맨 먼저 든 생각은, 그가 자신을 깊숙이 숨겼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쩐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더욱 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나우시카'같은 얘기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토토로는, 뭐랄까, 훨씬 밑바닥에 있는 의식이다. 만일 누군가 '세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훼손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이 아름답다는 그의 견해는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한 견해가 기본이 되었을 때, 그에 합당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웃집 토토로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잃어버..
무라카미 하루키, '레이몬드 카버 작품해설', "숏컷", 집사재 쓰여진 말 자체는 단순하다. 원래가 의식적으로 단순한 말을 사용해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그 경향은 더욱더 강해졌다. 그리고 말 그 자체가 단순해지면, 단순해질수록, 단순한 말의 편성과 구조는 점점 더 연마되고 정교해진다. 간단한 말들을 짜맞춤으로써 심오한 이야기가 가능해진다(거꾸로 된 작품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말년의 카버가 도달한 경지이다. - 레이몬드 카버의 작품 해설(하루키) 중에서 -
* 무라카미 류, [69], 양억관옮김, (예문, 1996) 읽으면서 내내,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꽤나 열심히 읽던 학원소설이나, 하이틴 로맨스가 생각났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라면 알겠지만, 학원소설은 조흔파의 '얄개전'이나 오영민의 '내일모레글피', 그리고 작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쌍무지개 뜨는 언덕' 같은 소설을 말한다. 어째서 학원소설이었을까? 당시에는 본격적인 만화잡지 같은 게 없었다. 그러니까, '보물섬'도 나오기 전이다. 그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잡지는 '어깨동무'나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였다. 물론 '어깨동무'나 '새소년'은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다른 잡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학원소설이란 그런 잡지에 연재되던 소설이었다...
레이몬든 카버,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해줘], 안종설 옮김 (집사재, 1996) - 에세이 : '글쓰기에 대하여' 발췌 어떤 작가들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정확하고 참신한 시선, 또한 그러한 시선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하게 맥을 짚어내는 것 등은 재능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 위대한 작가, 심지어는 아주 좋은 작가들도 모두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을 창출해낸다. 이것은 스타일하고도 밀접한 연관이 있지만, 스타일 하나만을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쓰는 모든 것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백한 서명이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의 세계일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