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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미안한데, 이 옷 좀 벗을게" 하고 여자가 말했다. 나는 상관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여자는 실내가 더워서 겉옷을 벗는 것까지 나에게 물어보는 것일까? 여자는 모자가 달린 두꺼운 회색 후드 티를 벗었다. 안에는 가슴부근에 영문 로고가 쓰여있는 얇은 면 티를 입고 있었다. 무슨 색이었지?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시내의 어느 한 술집에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다. 새벽에 영업을 하는 술집이 대개 그러하듯이, 조명은 어둡고 자리는 좁다. 여자는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다. 그게 언제였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해 그 술집에, 그 시간에 우리가 자리를 마주하고 앉게 된 거지? 나는 기억의 선후관계를 하나하나 따져본다. 여러 가지 기억들이 혼동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자가 벗었던 회..
다시 게을러졌다. 술먹자.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김화영, 문학동네, 1998 내가 파트릭 모디아노라는 이름을 처음 만난 것은, 군에 있을 때였다. 나는 군대에서 그의 소설 '청춘시절'을 읽었다. 민음사에서 출판한 책이었는데, 책의 표지가 너무 촌스러워서 선뜻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제목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청춘시절'이라니. 하지만 군대에서의 나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내가 쓴 최근의 소설에서, 나는 '청춘시절'이라는 단어를 기어코 썼는데, 그것이 모디아노의 작품에서 비롯된 단어인지, 아니면 실제로 내가 군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 스스로 썼던 단어인지, 이제와서는 잘 분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날 밤, 어떤 한 시절이 ..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강원도의 힘'에 대해 들었다. 대개는, '참 좋다'는 쪽이어서, 그러면 나도 꼭 한 번 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죽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기회가 닿으면, 가령 잊고 있다가 우연히 비디오 샵에 꽂혀있는 여러 영화들 중 그 제목이 눈에 쑥 들어와도, 뽑아들지 못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누구로부터 아무 얘기도 듣지 않았는데도, 선뜻 집어 들어 본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영화가 나를 실망시켰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고, 정확하지 않은 기억으로는 두 번쯤 보았던 것 같다. 감독의 전작 영화에 대해 실망한 것도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추천을 받았음에도, 어쩐..
나는 종종 다른 사람의 무엇으로 내 자신을 규정하면서 힘을 얻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왜냐하면 '그의 무엇'이란 결코 내 자신의 규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취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내'가 아니라 '나의 무엇'이다. 즉, 거짓이다.
엠마뉘엘 카레르의 작품으로 내가 맨 처음 읽은 것은,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이 1986년 작이고, [겨울아이]가 1995년이니까, 그 사이 거진 10년의 기간이 있는 셈이다. 간략한 저자 약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콧수염]을 통해 이미 진정한 작가의 대열로 올라선 한 작가에게 주어진 10년은 분명 긴 시간이고, 의미심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겨울아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10년의 기간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과연 그렇다면, 그 10년 동안 엠마뉘엘 카레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역시 저자약력과 작품해설을 보면, 카레르를 '눈속임의 전문가이며 괴기담의 대가' 그리고 '능수능란한 을 구사하여 허구가 현실을 능가하고, 이성이 상상 앞에서 흔들리고, 부조리 앞에서 논리가 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처음부터 몰랐고, 그리고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나는 '그 일'을 이용해서 현재의 나를 구제하고자 한다.
'모레 오전에 시간 있으세요? 정원 청소 좀 하려고 하는데...'하고 직원이 내게 물었다. '목요일이요?' '아니, 일요일이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죠?' 오늘은 금요일이었다. 저녁 시간에 종로에 잠깐 나갔다. 책을 몇 권 구하기 위해서였다. 거리에 벌써 겨울 군것질 거리가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릿노릿한 계란 빵 같은 것 말이다. 금새 오방떡이니, 군밤이니, 고구마니 하는 것들도 잇따라 나올 것이다. 아, 추워라 하고 고개를 움츠리고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종종걸음을 칠, 겨울이 오늘 저녁 벌써 다가와 버린 기분이었다. 아직 반바지를 입은 젊은 사람 몇몇이 보였지만, 선택을 잘못했다는 걸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종로 거리는 겨울에 잘 어울린다. 여름 종로는 지저분한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