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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가만히 바라보면, 굉장히 행복해지기도 하고 또 굉장히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행복한 편이다. 거리(distance)에 관해서 어디선가 이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분명히 그것은 내가 그 사람의 인생을 멀리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재미없다. 대신, 인생이란 아무튼 행복한 것이다, 하고 정의 내리는 쪽이 낫다. 물론 자기 자신은 잘 모를 테지만.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 참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는 내 인생을 그렇게 생각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그 사람에게 묻고 싶어진다. 알려줄래요, 왜 내 인생이 행복하죠, 내가 무엇을 기뻐해야 하나요?
행복이란 두려움에 둘러 싸여 있는 것이다. 두려움을 통과한 뒤에야 우리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나는 분명히 굉장한 낙천주의자가 분명하다. 아주 단순하다. 스스로 저지른 실수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하다가도, 금방 잊고 만다. 내게는 어떤 아픔이나 고통의 기억도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그 아픔의 크기나 깊이의 실체를 시간 속으로 흘려 버린다. 나의 이 낙천주의자가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바라는 게 있다면, 그곳이 바로 이곳은 아니었으면 싶다. 낙천주의는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 있는데, 언제까지나 미래가 계속 존재할 리는 없다.
다들 알고 있는 얘기지만, 지나간 노래들은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게 해준다.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진부한 표현일테지만, 그것은 과거로 통하는 열차표와 같다. 아무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티켓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 그 여행은 언제나 아프도록 감미롭고, 맥이 탁 풀리도록 씁쓸하다. 지금 듣고 있는 이 노래는, 몇 년 뒤, 또 내게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
어른은 아이와 진심으로 놀지 않는다. 그저 놀아줄 뿐이다. 아이는 어른과 놀기 위해서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른은 놀지 못한다.
사람들은 곧잘 운다. 운다는 행위 자체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특별하지도 않다. 그것은 우리가 재채기를 하거나, 딸꾹질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점을 제외하면, 운다는 행위는 일반적인 생리현상과 다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감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어진다. 아픔이나 슬픔의 감정이다. 그러나 운다는 행위 자체를 깊숙이 따지고 들어가자고 생각하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가령, 먼저 눈물을 흘리는 행위를 운다는 행위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향의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눈물을 일종의 울음의 전단계 정도로 바라보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먼저 눈물을 흘리고, 다음에 울음을 운다. 눈물만 흘리고, 울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어머니는, 저를 믿는다고 하셨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나도 나를 믿지 못하는데. 잘못은 비와 같아요. 우린 잘못을 피할 수 없죠. 작은 우산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해요. 잘못은 우리의 뿌리예요. 잘못이 없어지면, 우리도 살아갈 수 없어요. 근데 어떻게 세상이 완전해지리라 희망할 수 있죠? 사람들은, 내게 거짓말을 시켰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아픔은 용서의 대가가 아니죠. 그렇죠. - 언젠가의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