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00/02 (7)
시간의재
내가 워크맨을 듣기 시작한 건, 재수 때부터였다. 좀 외로웠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내 외로움의 내력은 깊다. 난, 내 삶을 가끔 돌아보면서, 심리학자의 시선으로 아, 그래서 지금의 내가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구나 분석하곤 했다. 난, 내 외로움의 이유를 알고 있다. 아무튼, 학원의 야간자율 학습시간이나 자율학습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일상적으로 워크맨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었다. 그 시절 내가 들었던 노래는, '에어서플라이'와 '봄여름가을겨울'이었다. 특히, 에어서플라이는 요즘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게 될 때면, 난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게 된다. 내가 그 시절을, 그 노래의 시절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뭐 이런 종류의 감정을 가지는 건 아니다. 돌아가고 ..
오래전에, 이건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내가 군대를 가기 전인지 갔다온 후인지도 모르겠다, 내 동기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고 싶어'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고, 집으로 가는 차는 이미 끊겼다. 다행히, 계절은 여름이어서 얼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우린, 남은 돈을 다 털어서 맥주를 샀고, 가로등도 꺼진 노천극장으로 올라갔다. 한심했다. 우린,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 대가로 자기 집, 자기 방에서의 달콤한 잠과, 편안한 아침을 잃어버렸다. 달이 무척이나 밝은 밤이었다. 노천에서 밤을 새워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달은 항상 '잘살기 탑' 위에 떠 있다. 난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한 때는, 호감을 가졌던 여자였는데 곁에서 한 달쯤 지켜본 뒤에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여자의 그런 말을 듣고, 난 정말..
시골에 내려갔다 올라왔다. 이렇게 말하면 안되지만,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유배를 가는 기분이다. 여러 가지 것들이, 내가 말하는 걸, 심지어 생각하는 걸 방해한다. 그렇게 생각해선 안 돼. 나도 물론 그건 알고 있다. 생각을 '나뭇가지'에 비유한 시를 알고 있다. 난, 가끔 내가 생각해선 안 되는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그 나뭇가지를 생각한다. 생각의 가지들은, 제 때에 가지치기를 해주지 않으면 삶을 망친다. 아버지는 아직도 생산자이셨다. 아버지는 아직도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고 계셨다. 뭘 생산하시죠? 아버지의 냉장고는 텅 비어 있는데. 아버지가 생산하신 생산물은 어디로, 누구에게로 가는 거죠? 알아요. 저도 아버지의 생산물이잖아요. 죄송합니다. 전, 아직도 죽음을 생각해요. 고등학교 이후로 그 버릇을..
지난 두 번의 소설 세미나에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건, '진부함'이란 단어였다. 사람들은, 곧잘 당당하게 말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든지 이미 모든 것은 다 발병되었고, 모든 이야기의 패턴과 주제와 기법들은 실험되었다, 라고. 정말일까? 3학년 1학기 '물리학' 교양강좌에서 교수님은 첫 시간, 우주는 무한한가, 아님 유한한가 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간단하다. 마치 오엑스 문제처럼. 정답은 우주는 무한하다, 였다. 아, 그렇군. 우주는 무한해. 수업이 끝나고 밥이라도 먹으러 가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우주가 유한하지 않고 무한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무한한가라는 점이다. 난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으므로, 잘 설명할 수가 없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씨의 ..
알았다. 분명, 백미터 달리기 선수가 시합에 임하기 전 근육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워밍업을 하는 것처럼, 문장을 쓰는 행위, 특별히 소설을 쓰는 경우에도 그러한 사전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건, 차라리 배우가 슬픈 장면을 찍기 전에, 그리고 눈물을 안약 없이 흘리기 위해 슛이 들어가기 전부터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 가깝다. 중요한 건, 리듬을 타는 것이다. 몰입해야 하고,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 가령, 목이 말라서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뭔가를 주섬주섬 챙겨먹는 행위는 최대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배부른 정신은 소설을 쓸 수 없다. 소설의 일종의 결핍으로 비롯되는 양식이다. 전화도 안 된다. 세계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정신적 공복상..
마음이 넘어지지 않으려면 꼭 맞는 구두를 신으세요 - 여자의 감각을 감탄함 中 - 난 이런 문장이 좋다. 구두가 꼭 맞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넘어지고 다친다는 식의. 사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는 모른다. 모른다고 생각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잘 맞지 않는 구두를 신은 여자들을 떠올린다. 왜 그녀들은, 잘못된 구두를 신는 걸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발이 작을수록 미인이라는 통념 같은 게 작용해서 일부러 한 치수 정도 작은 구두를 신기도 하고, 크게 신는 게 유행일 때도 있었고 등등. 아니면, 정말로 맘에 드는 구두를 발견했는데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가 품절 되었을 때, 그래도 여자는 구두를 산다. 이상의 등등의 이유로, 그들은 잘못된 구두를 신는다. 발이 까지기도 하고, ..
아파? 아이들은 무지개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누가 물었는지, 아니 그들이 누구인지 이제 난 기억하지 못한다. 눈물을 흘렸나보다. 눈이 뻑뻑하고 그들의 모습이 말라 일그러져 있다. 하늘 빛깔이 달라졌다. 파랗던 것이, 좀 붉어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난, 놀이터 성(城) 2층에서 떨어졌다. 우린, 치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술래가 나를 붙잡으려 했고, 붙잡았고, 놓쳤다. 그리고, 난 떨어져 잠깐 정신을 잃었다. 아파? 난 대꾸하지 못했다.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얼마간 숨을 고르자, 조금 편해졌다. 흙냄새가 나고, 등으로 바닥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얼굴 위로, 해질녘의 황토빛이 번져 있다. 그 빛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알려주었다. 놀이는 끝났다. 아이들도,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