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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용산행 열차를 기다리며 본문

단상

용산행 열차를 기다리며

물고기군 2000. 2. 2. 03:59
아파?
아이들은 무지개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누가 물었는지, 아니 그들이 누구인지 이제 난 기억하지 못한다. 눈물을 흘렸나보다. 눈이 뻑뻑하고 그들의 모습이 말라 일그러져 있다. 하늘 빛깔이 달라졌다. 파랗던 것이, 좀 붉어진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난, 놀이터 성(城) 2층에서 떨어졌다. 우린, 치기 장난을 하고 있었다. 술래가 나를 붙잡으려 했고, 붙잡았고, 놓쳤다. 그리고, 난 떨어져 잠깐 정신을 잃었다. 아파? 난 대꾸하지 못했다.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얼마간 숨을 고르자, 조금 편해졌다. 흙냄새가 나고, 등으로 바닥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얼굴 위로, 해질녘의 황토빛이 번져 있다. 그 빛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알려주었다. 놀이는 끝났다. 아이들도,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괜찮냐?
친구 녀석은 내 등을 가볍게 툭툭 내리치다가, 그것도 힘이 들었는지 슬며시 그만두어 버린다. 더 이상 내리쳐봤자, 나올 것도 없었다. 친구가 건네준 휴지로 입가를 닦고, 코를 풀었다. 코끝이 찡하다. 마시던 맥주로 입안을 헹궜다.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문예반 사람들이 모였다. 용케도 누군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을 물색했고, 그가 담을 타고 2층 창문을 통해 문을 땄다. 그 해 난 대학에 떨어졌고, 친구는 붙었다. 술자리는 늦게까지 흥겨웠다. 난 술을 많이 마셨고, 그만큼을 게워냈다. 친구가 따라 나왔다. 친구와 난 오랫동안 길가에 앉아 달 같은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다음날에 우린 헤어졌고, 그 뒤로 친구를 보지 못했다. 학원의 여름방학 즈음, 물놀이를 갔다 익사했다는 치구의 소식을 들었지만, 난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한 편의 소설을 썼다.

열까지 세어봐요.
여자의 습관이었다. 내가 열까지 세면, 여자는 그럼 이제 가요, 라고 말했다. 나중엔 열까지 세어보라고 하면, 일부러 천천히 센다거나, 엉터리로 아홉 다음에 다시 하나를 세는 둥 장난을 치곤 했다. 여자는 약속도 없이 나를 찾아왔다. 우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골목 보도의 턱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가끔씩 사람들은, 담배불빛처럼 골목 입구에 나타나서 우리를 지나쳐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등뒤로, 진열대의 상품을 비추기 위해 켜 놓은 대리점의 불빛이 바닥에 여자와 나의 그림자를 만들었다. 불빛은 터무니없이 하얗고. 난 농담을 했다. 나의 버릇이었다. 헤어질 때, 농담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알고 있는데, 잘 고칠 수가 없다. 여자는 일어서기 전, 내게 열까지 세어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한 일이었다. 난 아직도, 몇까지 세어야, 여자를 잊을 수 있는지 모른다. 아니, 아홉까지 세고 나도 흔히 하던 장난처럼 난 다시 하나로 돌아오곤 했다. 여자는, 아직도 그 버릇을 가지고 있을까? 자신의 남자에게, 아직도 헤어질 때마다 열까지 세어보라고 말할까?

어디가?
난 역의 안내 전광판을 봤다. 다음 열차 인천행. 용산행이 오려면, 앞으로 1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의자에 앉았고, 습관처럼 담배를 물었다. 철길 건너편의 대형 입간판은 최근에 새로 칠했다. 칠하는 걸 본적이 있다. 그 뒤로 울타리가 있고, 너머에 차도, 너머에 낮은 건물들이 보인다. 실제로 그 거리는 멀지 않은데, 멀게 보인다. 울타리 때문이다. 몇 번인가, 그 거리를 걸은 적이 있다. 그 곳에선 내 앉은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역조차 잘 눈에 띠지 않는다. 7년 동안 난 이 역을 이용했다.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앞으로 2년은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새로 칠한 간판은 나를 모른다. 그 전의 간판도 나를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가야 되지 않았을까?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무르는 건 아닐까?
안내방송과 함께,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용산행 열차가 들어선다. 난 자리를 일어서, 휴지통에 담배꽁초를 버린다. 두 발짝 정도 앞으로 다가서며 가방을 고쳐맨다. 열차는 천천히 속력을 줄이고.

갈 데가 있었으면 좋겠어.
아파?
응.
많이 아파?
아니, 아주 조금

어김없이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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