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진부함 본문
지난 두 번의 소설 세미나에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건, '진부함'이란 단어였다. 사람들은, 곧잘 당당하게 말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라든지 이미 모든 것은 다 발병되었고, 모든 이야기의 패턴과 주제와 기법들은 실험되었다, 라고. 정말일까?
3학년 1학기 '물리학' 교양강좌에서 교수님은 첫 시간, 우주는 무한한가, 아님 유한한가 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간단하다. 마치 오엑스 문제처럼. 정답은 우주는 무한하다, 였다. 아, 그렇군. 우주는 무한해. 수업이 끝나고 밥이라도 먹으러 가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우주가 유한하지 않고 무한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무한한가라는 점이다. 난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으므로, 잘 설명할 수가 없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씨의 병 같은 얘기다. 우리는 무한을 상상할 수 없다. 왜냐면, '무한'이란 개념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더 멀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훈이 있다. 어떠한 사실이란, 사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사실이 위치하고 지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고법이다. 머리통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하나의 테이터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16비트에서 32비트로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진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 진부함을 벗어날 수 없다. 일종의 도약이 필요하다. 1층에 있는 자는, 2층도 1층과 똑같은 형태를 가졌으리라 상상한다. 더 넓을 수도 없고, 더 좁을 수도 없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2층이 사실은, 3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4차원의 공간일지. 2층이 사실은 1층에서 보낸 시간일지. 만약 그렇다면 1층에서 2층을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1층에 있는 인간은, 1층의 사고 밖에 할 수 없으므로. 다만, 우리가 영원히 부정할 수 없는 건, 2층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건,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른 식으로 말해보자. 사람들은, 흔히 소설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믿는다. 일종의 감정을 전달하거나, 사실 또는 진실, 고발이나 르포의 형식이라고 말이다. 때로, 그것은 소설과 이론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때로, 그것은 소설과 기사문을 혼동시킨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그렇지 않다. 소설이 전달하는 건 '하나의 문장'이 아니다. '문장'이 포함되어 있는 맥락이며, 맥락을 포함하고 있는 '문장'이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철수가 영희를 사랑하는 공간이며 시간이다. 하나의 액션이 아니라, 그 액션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적인 맥락인 것이다. 게다가, 맥락은 소설 내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독자에게도 있고, 사회와 역사, 시대에도 있다. 그렇게 해서 철수가 영희를 사랑하는 당위가 생기고, 필연성이 확보되며, 또한 언제나 모순이 존재하고, 인식을 필요로 한다. 브레히트 식으로 말하면,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수용'이 아니라 '인식'이며, 남는 건 어떠한 결론이 아니라, 선택이다.
'진부함'이란 언제까지나 우리가 도망쳐야 할 괴물이다. 동시에, '진부함'이란 우리가 뒤집어 써야 할 외피다. 역설적이게도, 우린 수많은 부정을 거듭해야만, 긍정할 수 있고, 수많은 금지를 배우고 만들어냄으로써, 자유로와 질 수 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하지 말자. '다 진부하잖아요. 진부하지 않은 주제가 어딨어요. 결국 뻔한 얘기 아닙니까? ' 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연마해야 할 것이 단지 기법의 문제가 되는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건,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우린 오만하게도 이 세상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그래서, 이 세상이 진부하다고 말하는가? 아님, 우리의 삶이...
3학년 1학기 '물리학' 교양강좌에서 교수님은 첫 시간, 우주는 무한한가, 아님 유한한가 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졌다. 간단하다. 마치 오엑스 문제처럼. 정답은 우주는 무한하다, 였다. 아, 그렇군. 우주는 무한해. 수업이 끝나고 밥이라도 먹으러 가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문제는 우주가 유한하지 않고 무한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무한한가라는 점이다. 난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으므로, 잘 설명할 수가 없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씨의 병 같은 얘기다. 우리는 무한을 상상할 수 없다. 왜냐면, '무한'이란 개념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항상 더 멀리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훈이 있다. 어떠한 사실이란, 사실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사실이 위치하고 지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결국 하나의 사고법이다. 머리통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하나의 테이터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16비트에서 32비트로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진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자는, 그 진부함을 벗어날 수 없다. 일종의 도약이 필요하다. 1층에 있는 자는, 2층도 1층과 똑같은 형태를 가졌으리라 상상한다. 더 넓을 수도 없고, 더 좁을 수도 없다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2층이 사실은, 3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4차원의 공간일지. 2층이 사실은 1층에서 보낸 시간일지. 만약 그렇다면 1층에서 2층을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1층에 있는 인간은, 1층의 사고 밖에 할 수 없으므로. 다만, 우리가 영원히 부정할 수 없는 건, 2층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건,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른 식으로 말해보자. 사람들은, 흔히 소설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믿는다. 일종의 감정을 전달하거나, 사실 또는 진실, 고발이나 르포의 형식이라고 말이다. 때로, 그것은 소설과 이론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때로, 그것은 소설과 기사문을 혼동시킨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그렇지 않다. 소설이 전달하는 건 '하나의 문장'이 아니다. '문장'이 포함되어 있는 맥락이며, 맥락을 포함하고 있는 '문장'이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철수가 영희를 사랑하는 공간이며 시간이다. 하나의 액션이 아니라, 그 액션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적인 맥락인 것이다. 게다가, 맥락은 소설 내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독자에게도 있고, 사회와 역사, 시대에도 있다. 그렇게 해서 철수가 영희를 사랑하는 당위가 생기고, 필연성이 확보되며, 또한 언제나 모순이 존재하고, 인식을 필요로 한다. 브레히트 식으로 말하면,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수용'이 아니라 '인식'이며, 남는 건 어떠한 결론이 아니라, 선택이다.
'진부함'이란 언제까지나 우리가 도망쳐야 할 괴물이다. 동시에, '진부함'이란 우리가 뒤집어 써야 할 외피다. 역설적이게도, 우린 수많은 부정을 거듭해야만, 긍정할 수 있고, 수많은 금지를 배우고 만들어냄으로써, 자유로와 질 수 있다.
다만, 이렇게는 말하지 말자. '다 진부하잖아요. 진부하지 않은 주제가 어딨어요. 결국 뻔한 얘기 아닙니까? ' 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연마해야 할 것이 단지 기법의 문제가 되는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건,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우린 오만하게도 이 세상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그래서, 이 세상이 진부하다고 말하는가? 아님, 우리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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