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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막차를 타고

물고기군 2000. 2. 26. 00:37
오래전에, 이건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내가 군대를 가기 전인지 갔다온 후인지도 모르겠다, 내 동기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유롭고 싶어'
우리는 술을 많이 마셨고, 집으로 가는 차는 이미 끊겼다. 다행히, 계절은 여름이어서 얼어죽을 염려는 없었다. 우린, 남은 돈을 다 털어서 맥주를 샀고, 가로등도 꺼진 노천극장으로 올라갔다. 한심했다. 우린,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 대가로 자기 집, 자기 방에서의 달콤한 잠과, 편안한 아침을 잃어버렸다. 달이 무척이나 밝은 밤이었다. 노천에서 밤을 새워 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달은 항상 '잘살기 탑' 위에 떠 있다. 난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한 때는, 호감을 가졌던 여자였는데 곁에서 한 달쯤 지켜본 뒤에는, 마음을 바꿔먹었다. 여자의 그런 말을 듣고, 난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난 예쁜 여자에게 한없는 관용을 베푼다. 그래서 뭔가 대꾸를 해주기로 맘먹었다. 한참이나 말을 골라보았지만, 적당한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유롭고 싶어'라는 말에 대꾸해 줄 말이란 거의 없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자유와 방종은 틀린 거야, 였지만, 우린 대학생이었고, 그건 정말 맥빠지는 말이었다. 무슨, 윤리 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았다.

오늘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 여자를 떠올렸고, 여자의 말을 떠올렸다. 난 말했다. 이봐, 자유는 새벽 네 시에 차를 타고 달리면서 파란 불이 켜져 있는 횡단보도의 신호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경찰이 없다고 불법 유턴을 하는 것도 아니야. 난 뭔지도 모르면서, 그 말이 맘에 들었다. 특히, 자유는 불법유턴이 아니다 라는 건, 내심 흐뭇할 정도였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다. 한 시간 내내, 난 '자유는 불법유턴이 아니다'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근데, 열차를 내리면서 난 그 말을 잊어버렸다. 난 다른 말을 생각해냈는데, 그건 이런 것이었다. 난 역까지 뛰어서 결국 막차를 탔는데, 그 막차를 타면서 난 내가 집 앞 역에 내리고, 역 계단을 올라서 보도를 걷고, 사거리의 신호등을 건너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알고 있었다. 말하자면, 열차를 타는 순간 그러한 일은 순차적으로 너무도 당연하게 나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열차를 내려서 집까지 오는 너무도 당연한 길들을 걸으면서, 난 이렇게 말했다 '내 삶은 가로등의 그림자처럼 왜 이렇게 낯선가?'

언제부턴가, 난 내일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해보면, 고등학교 때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난, 그녀에게 '자유는 불법유턴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은 걸 잘했다고 생각한다.

대신, 이렇게 말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얼마나 자유롭지 않은가?, 얼마나 자유롭지 않아야, 자유롭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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