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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며칠 동안, 끙끙대다가 오늘에야 겨우 올린다. 올리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문장'조차 되지 않는 문장이 허다하다. 두려운 일이다. 슬럼프일까? 문장이 써지지 않는다. 그러나 올릴 수 밖에 없고, 올려야 했던 건, 그것이 '마감'이기 때문이다. 문장이 써지지 않는다고, 문장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문장이 안 써질수록 문장을 써야 한다. 붓뚜겁을 덮어놓는 식의 짓은 해서 안된다. '렌즈'에 대한 소설평, 제목은 '문'의 비밀. 착각해서 안된다. 이 '문'은 '문'이 아니다. 1학년들, 왜 인트로 안 올리냐? (이제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군)
오랫동안, 또 문장을 쓰지 않았다. 4월도 반이 지났다. 살아나간다는 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아니, 틀렸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걸, 알아가는 것이다. 군 생활 3년 동안, 나는 고통이 개량화될 수 있음을 알았다. 개량화된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닌 것처럼, 개량화된 삶은, 더 이상 살아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원본을 카피해서 부분수정을 가해 완성시키는 수정본처럼, 일상은 대량 복사가 가능하다. 복사하기 붙이기. 복사하기 붙이기. 모든 유기체는, 비유기적인 것을 꿈꾼다. 가령 죽음 같은 것.
나는, 가끔 행복하다. 아마 '가끔'이란 부사는 '행복하다'는 동사, 또는 형용사에게 필수적인 요소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설명하고 싶은 건, '행복하다'라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감옥은, 기실 이 세상이 감옥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상징 또는 장치이다'라고. 이런 말을 들으면, 또는 읽으면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기 때문에, 때론, 거의 이런 경우는 없지만, 가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유가 생긴다. 잘하면, 나는 오래 세상을 살 것 같다. 잘못하면, 아마 대개는 잘못하겠지만, 나는 일찍 죽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선언, 슬로건이다. 나는 '지옥'을 믿는다. 그것의 현재성을 믿는다. 내게 필..
어쩐 일인지 최근에 두 번이나 '우는 여자'를 보았다. 둘 다 집으로 가는 전철에서 였는데, 첫 번째는 늦은 밤 막차에서였다. 난 전철을 타면 항상 문 곁의 의자등받이에 기대어 선다. 여자는 맞은편에 있었다. 전화를 걸고 있었고, 듣기만 했다. 전화를 끊고 몇 분 뒤, 여자는 자신도 모르는 채로 눈물을 흘렸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낀 뒤에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며칠 전이었는데, 전철 안이 아니라 전철을 기다리는 역에서였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내릴 역에서 바로 계단으로 이어지는 위치를 가늠하면서 성큼성큼 걷는데, 문득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보았다. 오래 울어서 눈은 퉁퉁 불어 있었고, 얼굴을 붉고, 번지르르 했다. ..
왕십리 역, 열차를 기다리며 철길너머로 분홍색 수건을 목에 두른 초로의 인부 하나, 환한 오후를 가로지르는 풍경. 길 따라 꽃들 바래어 가고, 나는 갑자기 궁금해진다. 저 풍경, 어디서 봤지, 어디서 봤더라. 묻다가, 걸음 그다지 빠르지 않은데 점점 멀어지는 저 풍경, 어디서 다시 볼 것인가. 어디서, 다시 너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몹시 궁금해진다.
오후 네 시, 도서관 1층 열람실, 커튼에 어리는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알 수 없는 일.그림자를 만드는 것은, 햇빛인가, 나뭇가지인가, 커튼인가? 내 마음의 슬픔을 만드는 것은, 기억인가, 그녀인가, 나인가?그러나 바람이 물살로 흐를 때마다 쓸리는 나뭇가지처럼, 햇빛이 출렁일 때마다 흔들리는 커튼처럼, 내 슬픔도 흔들리는 것이다. 해가 지고 뜨는 것처럼, 내 슬픔도 지고 뜨는 것이다. 그림자처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마치 한편의 경기와 같다. 이것은 비유다. 비유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고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말이다. 농구경기를 보다보면, 항상 관중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수비일 때, 큰 소리로 '디펜스'를 외친다. 해설자는 , '이번 수비를 잘 막아야 됩니다' 또는 '경기가 안 될 때, 수비에서 풀어야죠'라고 말한다. 그렇다. 수비에서 풀어야 한다. 이것도 비유다. 더 이상 생각을 진행시키지 말자. 다만 수비하자. 학교에도 열심히 나가고, 책도 읽고, 가끔 여자도 그리워하면서, 살자. 나에게 아직 그만한 시간은 남아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언젠가 '경기의 흐름은 바뀔 것이다'.
나는 가끔 내가 터무니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역시 어느 때에는 내가 터무니없는 '미움' 또는 '경멸'을 당하고 느낄 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나로선 당황스러운 일이다. 두렵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건 차라리, '그들'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종의 체념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하는 어떤 노력도 무용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름대로 마음 편한 일일지 모르나, 오늘 문득, 그 생각이 나를 쓸쓸하게 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진정으로 나눌 수 없는 걸까? 전철을 기라리면서, 어둔 밤하늘의 한없이 다정한 불빛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