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슬로건 본문
나는, 가끔 행복하다. 아마 '가끔'이란 부사는 '행복하다'는 동사, 또는 형용사에게 필수적인 요소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그러나,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설명하고 싶은 건, '행복하다'라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의 감옥은, 기실 이 세상이 감옥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상징 또는 장치이다'라고. 이런 말을 들으면, 또는 읽으면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기 때문에, 때론, 거의 이런 경우는 없지만, 가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이유가 생긴다. 잘하면, 나는 오래 세상을 살 것 같다. 잘못하면, 아마 대개는 잘못하겠지만, 나는 일찍 죽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선언, 슬로건이다. 나는 '지옥'을 믿는다. 그것의 현재성을 믿는다. 내게 필요한 건, 일종의 '관점', 거창하게 말하면 '세계관'이다. 커트 코베인은 죽었다. 비틀즈의 '존 레논'도 죽었다. 칸트도 죽었고, 니체도 죽었다. 심지어, '김현'도 죽었다. 아, 분명히, 나에겐 본래적인 결함이 있다. 이것은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유년지절, 어떤 의미에서 생득적으로 얻어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는 살 수 없다. 이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역시 잘하면, 이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은 한없이 무가치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있다는 역설을 나는 받아들이고 싶을 걸까? 나는 죽고 싶기 때문에, 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움직이고 싶기 때문에, 멈추고 싶은 것이다. 세상의 방식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세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너무 오래 혼자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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