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보기 (466)
시간의재
밤하늘에서 구름을 본다. 나는 그 구름이 하얀색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은 하얗다기 보다 파랗다. 구름이 하얗다는 건 편견이다. 구름은 제 빛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마음도 제 빛깔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안개에 쌓인 다리를 건너본 적 있어요? 너무나 짙은 안개였기 때문에 자신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죠. 그냥 걸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제 곧 끝이다, 나는 다리를 다 건넜다라고 느껴질 때까지 앞 못보는 장님처럼 걷는 거예요. 그래도 다리는 끝이 나지 않죠. 안개에 쌓인 다리는 끝이 나지 않아요. 결국엔 길을 잃고말아요.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나 외로웠기 때문에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말죠.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따라 안주할 수 밖에 없고... 결국엔 다리 위에 집을 짓는 거예요. 안개에 쌓인 다리는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그남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요. 그리고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끊임없이 그에게 매달리며 묻죠. 어땠어요? 안개는 이제 걷혔나요? 다리를 ..
항상 똑같은 꿈을 꾼다. 정확히 말해선 꿈이 아니다. (밈이라고 하던가? 스펠링은 생각나지 않는데, 계속 머리 속을 맴도는 말이나 이미지 또는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건 일종의 '밈'일 수도 있겠다. 근데 그게 항상 똑같은 거다. 학교를 올라가면서 또는 내려가면서 나는 언제나 같은 장면을 떠올리는 거다. 즉, 나는 타자다. 공이 날아온다. 공을 친다. 근데 내가 들고 있는 건, 배트가 아니라 칼이다. 그래서 정확히 공이 두동강이 난다. 마치 양파처럼, 귤처럼. 나는 딱딱한 야구공을 베어내고 싶은 거다. 그래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거다. 나는 모든 딱딱한 것들의 안이 궁금한 거다. 그래서 나는 걸으면서 문득, 팔을 휘두른다. 마치 공이 날아오는 것처럼, 배트를 휘두르는 것..
"그래, 따뜻한 행복감. 마치 일요일 오전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때의 그런 행복감.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 같은 행복감. 쾌락하고의 차이점은 따뜻한가 아닌가의 차이지. 쾌락은 좀 더 격렬한 거야. 도박성이 있고 게임 같은 거지. 위험해. 대신 강도는 훨씬 강하지. 게다가 빨리 피로해지고 지쳐버리지. 그러나 행복은 다른 거야. 특히 따뜻한 행복은.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어. 위험하지도 않고 격렬하지도 않아. 계절이 바뀔 때에 맡을 수 있는 냄새 같은 것. 매년 똑같은 냄새인데도 좋게 느껴지거든. 행복하단 말이야." - 소설 '리와인드' 중에서
불을 끄는 것만으로 사무실의 분위기는 확 달라진다. 또 정신없이 전화를 받고, 본관과 교수회관, 종합강의동을 뛰어다니다가, 또 나보다 열 살이 어린 학부보조조교와, 후배녀석과, 동기들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몇 대인가의 담배를 연결통로에서 피다가 바람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가, 혼자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오다 먼저 발견하고 누군가를 피해 돌아서다가, 그러다 다시 사무실, 불을 껐다. 하루에 50원씩, 그저 가만히 있어도, 연체료가 붙는 삶. 반납해야 하는데, 자꾸 게을러서 미루고 있다. 이 역할은 맘에 들지 않는다. 이런 비유도 맘에 들지 않고, 이런 식의 어투도 맘에 들지 않는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빌려서, 머리 속으로 짐작하기를 권당 3000원, 그래서 약 6000원의 연체료가 나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3000원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27일 연체였다. 기분이 이상하다. 연체료가 덜 나왔다는, 그래서 생각보다 덜 게을렀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조금 행복해져야 하나? 월요일 새벽, 술을 마시고 큰 실수를 저지른 느낌이 든다.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데, 기억이 날 때마다 무의식중에 입으로 혼잣말을 한다. '바보같이... 유치한...' 화요일 하루종일 일어나지 못했고, 그 때문에 학과사무실 업무 하나를 펑크냈다. 오늘 아침 학교를 오면서, 전화 한 통화만 했더라면, 단 1분만 몸을 일으켜서 전화 한 통화만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 텐데,..
분명히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나아가고 있다는 말에 '발전적인' 의미는 전혀 없다. 단적인 예로, 앞서 말했다시피 최근의 나는 무지 바빠졌는데, 나는 이 일로 아주 의기소침해졌다. 예전에는 분명 아무리 바쁜 상황이라 해도, 그래서 세상 사람 모두 바쁘다 해도, 나 혼자만은 바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내가 대단히 특별한 존재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럭저럭 나는 평범하게 살아왔다. 나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를 뚜렷이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평범한' 삶이란 것이 내게 너무 어려워져 버렸다. 여전히 어린애처럼 구는 건지도 모른다. 피터팬 증후군 같은 것일지도. 하루에 두 번 강을 건넌다. 어느 날 문득 하루에..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요즘은 너무 바쁘다. 후배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나는 원래 바쁜 사람이 아닌데, 요즘은 왜 이리 바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지금껏 주욱 평균치 보다 '바쁘지 않게' 살아왔기 때문에, 더 바쁘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격 문제인데, 나는 원체 바쁘게 이일 저일 모두 다 신경 써가며 잘 해나가는 타입이 아니다. 부득이하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경우에도, 나는 아무 거리낌없이 몇 가지 일을 제쳐놓는다.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거다. 그 일로 인해 물론 피해를 보기도 하고, 주위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견딜 수 없어진다. 내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심하게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나는 '게으른' 인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