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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행복한가, 라고 이제 묻는다면. 글쎄, 다시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냥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이야. 아주 나중에 그리워지겠지. 시간이란 그런 거니까.
한 편의 소설을 끝낼 때마다, 너무도 당연하게 나는 그 소설을 수십 차례 읽는다. 물건을 품평하듯이, 여러 각도에서 -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읽어본다든지, 전철의 출입구에 기대어, 모니터 화면으로 등등 - 점검해본다. 물론 그때마다, 내가 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느낌은 조금씩 달라진다. 꽤 괜찮은데 부터, 이렇게 형편없이 유치한 문장을 쓰고도 뻔뻔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줬구나 싶은 자괴감까지. 어떤 때는, 전혀 내가 쓴 소설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느낌은 하나로 고정된다. 단 하나. '무언가 빠져있다.' 더 잘 쓸 수 있었는데, 조금만 더 노력하고, 조금만 더 매달렸더라면 더 근사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식의 아쉬움이 아니다. 아주 치명적이고, 본질..
어떤 제목의 어떤 내용의 글을 올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쓰지 않을 수 없다. 쓰지않고는 못 배기는 문장이 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언제나처럼 운전기사에게 라디오를 틀어달라고 했고, 에어컨이 시원찮은 탓인지, 조금 더웠다. 고가를 탔고, 다시 내려왔다. 세종 호텔 앞은 너무 환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내내, 그의 뒤틀린 팔을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생의 무게를 버텨내기에 너무나 허약하다. 누군가는 자신을 단련시키고, 누군가는 자신의 생을 가볍게 하는 법. 내 가벼움은 초라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뒤틀린 팔은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어째서... 어째서 자기 생을 가볍게 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 거지. 어째서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어째서 한 발쯤 뒤로 물러..
지금은 아니지만, 내가 군대를 가기 전, 내 방은 4층이었고 책상 옆으로 창이 있었다. 창을 통해 보이는 거리라고 해봤자, 아주 단조로운 아파트촌의 풍경이었지만 가끔 그 풍경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진다. 가로등이 있었고, 빼곡이 주차된 차들, 키 큰 나무들이 있었다. 그 집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새벽에 눈이 오면 가로등 불빛 속으로 날리는 눈발을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바라보곤 했다. 바로 맞은 편 가까이 똑같은 층의 아파트 건물이 있어서 하늘이 넓게 보이지 않았지만, 맑은 날의 새하얀 구름이나 잔뜩 찌푸린 날의 흐린 하늘 빛깔도 좋아했다. 아,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한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 시절 나는 이런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불현듯 좋은 노래가..
언젠가 '우는 여자 모티브'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사실 '운다'는 행위와 '여자'를, 그렇게 함부로 연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우는 여자'와 '우는 사람'이라는 두 개의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설혹, 그 '우는 사람'이 '여자'라 할지라도 굳이 '우는 여자'라고 말하는 방식은 또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우는 여자'가 '우는 사람'과 다르게 생산하는 의미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우는 여자'는 정말로 하나의 모티브가 될 수 있을까? (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티브가 될 수 없으므로.) 그것과 다르게, '운다' 더 구체적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행위는, 문득 생각난 건데, 참 신비롭다. 경험적으로 내..
자꾸 들녘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건 정말 들녘의 위기다. 전번 학기에는 '문'정화가 장학금을 받더니, 이번학기에는 '문'상미다. 이런 걸 두고 랑데뷰 홈런이라고 하나? 공부잘하고 성실한 인간을 생득적으로 꺼려하는 나로서는, 들녘이 모인 자리가 불유쾌해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휘와 재영, 특히 재영은 쏙 마음에 든다. 규열이도 만만치 않다. 대체 대학 4학년이 F를 받다니.
농담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만의 한 권의 단어장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 했지? 단어장이라는 비유의 골자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단어들에 이름을 붙이고(물론 모든 단어에는 이름이 있다. 아니, 단어가 이름이다.), 단어들에 기억을 붙이고, 단어들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붙인다. 어떤 행운이 있어 미래의 어느 날, 우리의 삶이 몇 시간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마지막 그 순간에 자신에게 남은 것을 헤아려볼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한 권의 단어장일 뿐이라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것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코 비관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이 갑자기 허무해지는 것도 아니다. 위와 같은 생각의..
나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나무는 키가 아주 크고, 잎이 무성하고, 바람에 잘 휘어지는 나뭇가지를 가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무성한 잎들은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듯 온몸을 흔들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98년 여름, 나는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집에서 전철로만 한 시간을 가야 하는 장지동의 면허학원에 등록했다. 그렇게 멀리 있는 학원을 등록한 이유는,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그 학원이 '지정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운전교습을 받고, 바로 그곳에서 시험을 쳐서 면허를 취득할 수 있는 학원이다. '지정학원'의 구비요건은 무엇보다 넓어야 한다. 그래서 '지정학원'은 대개 서울의 외곽지역에 위치하는 것이다. 오전반이었는데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해서 기간에 비해 시간을 채우지 못했고, 평일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