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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다시 한번 잠이란 건 정말 이상한 거다. 그게 어째서 전철을 탈 때만 그렇게 졸리운지 알 수가 없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곧장 침대로 뛰어드리라 맘먹었는데, 결국 이런 걸 만들었다. 얼마나, 이곳에 글을 채울지 알 수 없다. 내 모든 일이 그러한 것처럼, 곧 시들해지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만들어 놓고 나니 마음이 흐믓하다. 그러니까, 이건 일기장이다.
예전에는 사라지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것, 또는 오래 지속되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일까. 낮은 것과 높은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밝은 것과 어두운 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하나의 단어, 하나의 사물, 하나의 현상에는 가치가 없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가리키는 손가락, 바로 나였다. 정말 사라지는 것에는, 그래서 사라진 것에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내가 좋아했던,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은 가치가 없다. 분명 그렇다. 과거의 어느 순간,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을 때는 분명 가치가 있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그러나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그것은 가치 없는 것,..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가다가 깜박 존다. 완전히 잠에 빠진 건 아니고, 시간의 흐름이 기묘하게 뒤틀어진 느낌. 회기역에 이르러 억지로 몸을 일으켜 열차에서 빠져 나온다. 자고 싶다.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면, 이곳이 역사가 아닌 내 방이었으면 좋겠고, 내 눈앞에는 이제 막 세탁해서 약간 서늘한 느낌을 주는 하얀색 시트가 씌워진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손가락을 튕겨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다른 대안. 어서 빨리 학교로 올라가서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과사무실 소파에 누워서 자야겠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고 개찰구를 빠져나와 다시 계단을 내려가고 중소기업은행 앞 신호등에 다다르기도 전에 잠은 어느새 달아나 버린다. 아무렇지도..
내 나쁜 버릇 중의 하나는,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세상에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아니, 설명을 하지 않아야 더 잘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아니, 설명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이 있다. 설명은 너에게 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는 것이다.
1. 토마토는 이상한 과일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참외나 수박도 과일이 아니다.) 겉과 속의 색깔이 똑같은 과일은 흔하지 않다. 껍질과 알맹이의 색깔이 똑같은 과일은 흔하지 않다. (물론 토마토 외에도, 감이나 당근, 어쩌면 귤이나 오렌지도 겉과 속의 색깔이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개 속의 색깔이 아니다. 겉과 속은 서로 다른 원인에 의해 색깔이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토마토의 겉과 속의 색깔이 같은 것은 우연이다. 2. 우리가 나누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물론 마음이란 것이 순전히 비유적인 의미라면, '나눈다'는 행위도 비유적인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해도,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마음이라해도, 마음은 나눠지지 않는다. 우..
1년 전에 헤어진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목소리 같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가 울면서 얘기하는 것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냐고 물었다. 나로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개과천선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나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나쁜 인간이다. 왜냐하면 착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매번 배반당하면서도, 화가 날 정도로 착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끊기 전, 괜찮아지면, 다시 행복해지면 전화하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만일 그녀가 다시 내게 전화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내 그녀가 불행한 거..
전에도 말했다시피, 내게는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어. 누구나 그런 버릇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없으니까, 특이하다면 특이한 버릇일 수도 있지. 그리고 전에도 말했다시피, 나의 혼잣말은 어떤 주기를 가지고 있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정말 그래, 나도 모르는 새에 '어떤 문장'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또 금새 '다른 문장'으로 바뀐단 말이야. 바뀌고 나서도 처음에는 잘 몰라. 내가 어떤 문장을 중얼거리는지 모르다가 문득 깨닫게 되지. 어, 혼잣말이 바뀌었네. 이번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나'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뭘 가르치려고 하는 거지? 요즘의 내 혼잣말,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분명 뭔가 내가 잘못하고 있긴 있나보다 라고 생각해본다.
그 시간이 새벽이었는지, 아니면 늦은 밤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무튼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어두웠다. 그리고 지독히 고요했다. 남부순환로를 따라 시속 100키로 이상으로 달리는 자동차 바퀴소리도 그 고요를 흔들 수 없었다. 아주 조금, 공기를 진동시켰지만 금방 믿을 수 없는 기억처럼 사라졌다. 역시 모르는 것은 내가 어째서 그 거리를 걷게 되었는지다. 거리 자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거리다. 그러나 내가 그 거리를 걷는 것은 낮의 일이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고, 몇 번이나 좁은 골목을 지나는 차들 때문에 벽면으로 몸을 붙여야 한다. 가로등은 제대로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그다지 가파르지 앉은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왼편으로 모래가 깔린 놀이터와 문을 닫은 24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