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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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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그 시간

물고기군 2001. 1. 11. 23:47
  그 시간이 새벽이었는지, 아니면 늦은 밤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무튼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어두웠다. 그리고 지독히 고요했다. 남부순환로를 따라 시속 100키로 이상으로 달리는 자동차 바퀴소리도 그 고요를 흔들 수 없었다. 아주 조금, 공기를 진동시켰지만 금방 믿을 수 없는 기억처럼 사라졌다. 역시 모르는 것은 내가 어째서 그 거리를 걷게 되었는지다. 거리 자체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거리다. 그러나 내가 그 거리를 걷는 것은 낮의 일이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고, 몇 번이나 좁은 골목을 지나는 차들 때문에 벽면으로 몸을 붙여야 한다.
  가로등은 제대로 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그다지 가파르지 앉은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왼편으로 모래가 깔린 놀이터와 문을 닫은 24시간 편의점과 중국집, 커다란 입간판을 세운 맥주집 등을 하나하나 지나쳤다. 언덕을 다 올라가서 오른편으론 초등학교가 있다. 교문은 닫혀 있었다. 굵은 철제 빔이 세로로 쳐진 교문이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교문과 똑같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지 확인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언덕의 끝은 편도 4차로의 대로와 맞닿아 있다. 길을 건너면 예술의 전당이다. 나는 지하도를 통해 길을 건넌다. 아직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국악관 쪽 계단을 통해 광장으로 올라갔다. 각기 다른 형태의 커다란 석조 건물이 광장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역시 아무도 없고, 어둡다. 가로등도 꺼져 있다. 그러나 칠흑같은 어둠은 아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어느 곳도 칠흑같이 어둡게 놔두지 않는다. 나는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고, 넓은 광장을 가로질러 걸어본다. 아, 이제 알겠다. 그 시간은 새벽이었다. 조금씩 하늘이 밝아지던 걸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발견한다. 저 편, 건물의 한 귀퉁이가 환하다. 뭘까? 무슨 빛일까? 그 편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궁금해한다. 하얀빛이다. 건물 안쪽에서 유리벽을 통해 흘러나온 빛이다. 누군가 실수로 등 하나를 끄지 않을 걸까? 그러나 무언가를 밝히기 위한 빛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엔 빛이 밝히는 반경이 너무 좁다. 가까이 다가가서 유리벽에 몸을 붙이고 그 빛의 진원지를 찾아 건물 내부를 들여다본다. 엎질러진 물처럼 그 빛은 바닥을 하얗게 적시고 있다.
  자판기였다.
  유리벽 안쪽 아무도 없는 텅 빈 건물에 자판기 하나가 덩그러니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저 혼자 밝아 있었다. 가슴 한 켠이 뭔가 무너지는 것처럼 아려왔다. 꽤 오랫동안 그 자판기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두려움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니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나를 두렵게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돌아서서 차마 뛰지는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내내 그 빛의 한 자락이 점점 더 자라나서 나를 붙잡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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