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02/02 (14)
시간의재
차로 여자를 데려다 줄 때마다, 여자의 집 근처에서 항상 걸리던 신호등이 있었다. 아니, 항상은 아니다. 간혹 가다 그 신호에 걸리지 않고 통과할 때마다 즐거워했던 기억도 있다. 그 신호는 큰길에서 우회전으로 꺾어진 뒤 짧은 터널을 통과해, 우리가 달리던 큰길과 나란히 놓여 있는 또 다른 큰길과 만나는 사거리 신호등이었다. 터널이 지면보다 낮게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차가 신호에 걸려 정지한 지점은 경사의 꼭대기였다. 차는 금방이라도 뒤로 미끄러질 것처럼 위태롭다. 신호는 길었다. 나는 핸드브레이크를 힘껏 잡아당겨 걸고, 클러치에서 발을 떼고, 여자 쪽을 바라본다. ‘다 왔어.’ 라고 말한다. 그때 여자가 나를 보며 지었던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참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아직 많은 것들을 기억..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라는 영화를 보면 아주 근사한 대사가 나옵니다. 그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개략적인 영화의 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뜻밖의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 생활을 시작하게 된 주인공 척은 약 4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해변가로 밀려온 알루미늄 합판(무슨 간이 탈의실 문짝 같습니다.)을 뗏목의 돛으로 삼아 그곳을 탈출해 사회로 복귀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인도에서의 고독한 삶의 위안이 되어주었던, 두 가지, 배구공 윌슨은 바다에서 잃어버리고, 또 여자친구 켈리는 자신이 이미 죽은 줄 알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또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캘리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제 나한테 남..
애완동물은 'pet'이야, 이 바보야.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 쪽팔려라. 헤헤.
이야,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따뜻해졌다 추워졌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따뜻한 날씨가 점점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겨울은 아주 지겹습니다. 지금은 오전 열한시입니다. 최근에는 일찍 일어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봤자, 오전 아홉시정도이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밥도 먹고, 티브이도 보고 그럽니다. 햇님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도 봅니다. 이야, 햇님이 정말 동쪽에서 떠오르더란 말입니다. 아니, 사실을 얘기하면, 해가 떠오르길래 그쪽이 동쪽인줄 알았습니다. 마루에선 시끄러운 진공청소기 소리가 들립니다. 청소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묵은 먼지를, 강력한 진공청소기로 흡입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 소리가 엄청 큽니다. 그래도, 그렇게 큰소리가 들리니 흡입력이 대단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 아주 ..
내게 있어, '생(生)'이라는 말은, 그와 뜻이 비슷한 '삶', '인생' 등과는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삶'은 현재적이고 지속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고, '인생'은 개체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인간 개체 전체의 삶'이라는 추상성을 담고 있다. 대신 '생'은 단위적이고 완결적이다. 개체적이면서 구체적이다. 거기에는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까지의 전과정이 담겨있다. 이런 식으로 '생'이라는 단어를 정의내리고 나면, 분명 '생'이라는 말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만 쓸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다. 장례식장의 조사에서나 쓰일 법한 말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다. 가령 '나의 생(生)'이라고 말한다면,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과, 또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 전체를 지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