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1999/12 (7)
시간의재
눈길을 걷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건 눈길을 걸어본 사람이 안다. 특히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포인트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없는 노릇이고, 단지 종래 양발에 실었던 신체의 하중을 위쪽으로 끌어올려, 무게를 분산시키는 것을 뜻한다. 눈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게다가 몇 번이나 넘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러한 방법을 깨닫고 행하게 된다. 자, 이제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미끈거린다면 재빨리 다른 발로 무게를 옮길 수 있게 된다. 아주, 날렵하게 발을 놀리면서, 그러면서도 결코 허둥대거나 펄쩍 펄쩍 뛰어선 안 된다. 말 그대로, 사뿐사뿐 걸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포인트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마..
오후 네 시, 권호와 규열이를 보내고 나머지 시간 내내 TV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 중간에 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월요일 날에 내려고 했던 레포트를 낼 필요가 없다고 전해주었다. 설마 재수강 시키겠냐, 라는 게 그 친구 말의 요지였다. 그래, 끝났다. 논문도 냈고, 마지막 시험도 치렀고, 더 이상 쓸 레포트도 없다. 대학생활이 끝난 것이다. 물론, 대학원에 진학했으므로, 별 다른 의미는 없다. 난 여전히 학교를 나가야 할 것이고, 앞으로 또 2년 어떻게 어떻게 꾸려질 것이다. 한없이 한심하고, 또 한없이 무가치한, 유보.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취하고, 기억도 하지 못할 말들을 배설처럼 쏟아내고, 또 뭐가 그렇게 심각한지. 분명 난 들떠 있었다. 다시 나한테 돌아오지 못할 말들을 지껄여댄 걸 보면. 선..
음. 언수형이 잠수를 탔단 말인가? 그런 일이, 그 말 많은 양반이 말없이 잠수를 타다니. 어이, 어디서 잠망경이라도 세우고 있으면 눈이라도 깜벅거려줘야지.아무튼, 이렇게 방안에 앉아 이 친구 저 친구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꽤 유쾌한 일인 것 같군. 역시 나도 이러쿵 저렁쿵 되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고 있지만. 내 자랑 같지만, 작년에 나도 민속학을 들었었는데 (물론 강사는 다른 사람이겠지만) A뿔다구를 받았다구. ^^;물망초라는 노래가 있어. 누가 불렀었지? 그런 노래들은 실제 가수가 불렀던 것을 기억하는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불렀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지. 기억이 항상 정확한 건 아니지만, 지금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듣고 있자니, 1학년 여름 농활때가 떠오르는군..
이젠 다 잊어버렸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집 전화번호, 핸드폰 번호, 삐삐번호, 직장번호.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다. 술만 마셨다 하면, 내 이름은 잊어버려도 그녀의 전화번호는 잊지 않았는데. 공중전화부스, 난 언제나 전화기에 머리를 기대고 전화했었지. 그 뒤 어느 날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모든 번호들이 문득 힘들어졌다. 문득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젠 다 잊어버렸다. 일 년 지났을 뿐인데, 잘 모르겠다. 그게 긴 시간인지, 아님 짧은 시간인지. 일 년 전 그 날, 이렇게 쉽게 보낼 수 있는 일 년일 줄 알았다면, 좀 더 의연했을 텐데.돌아보면, 언제나 그림자는 하나였다.
눈이 왔나봐. 어제 저녁무렵 창 밖을 내다봤을 땐 아스팔트가 까맣게 젖어있길래 비가 내렸나 싶었는데, 학교에 와보니 사람들 발 닿지 않는 곳에 하얗게 눈이 쌓였더라. 이상하지. 나이가 들 수록 사람은 냄새에 민감해지는 법인가봐. 눈냄새가 났어. 뭐랄까, 냄새란 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법이지만, 난 단박에 아, 눈냄새구나 라고 깨달았어. 항상 기억이란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 일깨워지는 법이니까. 눈냄새를 기억하기 위해선, 직접 눈냄새를 맡아봐야 한다구. 참 오랫동안 너에게 편지를 쓰지 못했구나. 솔직하게 고백하면 편지를 써야지 싶을 정도로 네 생각을 깊이 한 적이 없었던 탓이겠지. 오늘은, 무슨 까닭인지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집을 나서 학교까지 오는 긴 시간동안 네 생각만 했지. 시험이어서 페이..
고등학교 때였던가? 같은 반에 남우라는 친구가 있었다. 성은 모른다. 그래도, 이름만은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다. 지독히도 말이 없던 친구였다. 얼마나 말이 없었냐면, 반에서 친구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아, 상상해보라. 고등학교 삼 년 내내 그에겐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여 걸었고, 행여 눈이라도 마주치면 재빨리 회피하던 친구였다. 왜 그랬을까? 뭐가,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체구는 자그만했고, 몇 번인가 뒷자리의 아이들에게 돌림빵을 당하곤 했었다. 또 왜 그랬을까? 왜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을까? 그래, 그 친구의 이름이 남우였다. 언젠가, 짓궂은 친구 하나가 칠판에 커다랗게 이렇게 썼다. 男雨=레인맨 그래서 기억하는 거다. 언젠가, 다시 모교를 찾아갔..
첫 눈이 왔다고 합니다. 그 날 저도 깨어 있었습니다. 새벽 한 시쯤에 친구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는데, 글쎄요, 우리 동네엔 눈 같은 건 내리지 않더군요. 이건 첫눈이 아니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풍성하게 눈이 내린 시각은 새벽 세 시 네 시경이라고 하더군요. 뭐라도 좋은데, 왜 사람들이 첫 눈에 관한 얘기를 저한테 안 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첫눈 전령사? 뭐, 그런 직업이라도 있어서, 첫눈이 오는 날, 오는 시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화를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린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을 때야, 아, 올 겨울 첫눈이 왔구나 라고 입을 모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