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어째서 즐거운 일은 끝나는 걸까? 이 질문은 예전에도 말했듯이 일본에서 제작된 티브이용 만화, “보노보노”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이 만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골수 매니아 층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정도로 완성도가 검증된 유명한 만화였다. 이른바, 어른들을 위한 철학적인 동화, “어린왕자”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어린이 만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게시판을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나는 이미 똑같은 제목의 글을 썼고,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2000년 1월의 일이다. 게시물 번호 46번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위의 질문에 대해, 그리고 만화에서 제시된 그 해답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다시 그 답을 이곳에 적자면 이렇다. - 어째서 즐..
호레이스 월풀(18세기 영국의 문필가 - 옮긴이)은 언젠가 세상이란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우스꽝스럽고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적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 존 어빙, “가아프가 본 세상” 중에서
열한 시에 문을 닫는 관계로 열 시 삼십 분경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항상 신경이 쓰인다. 일단은 들어오는 입구에서 자리로 안내하면서 영업시간이 열한 시까지인데 괜찮으시겠냐고 묻는다. 그럼 대개의 손님은 현재 시간을 확인하고 (열 시 삼십 분이다!)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또 대개의 손님은 결코 열한 시 이전에 자리를 일어서는 법이 없다. 나는 이 점이 아주 못마땅하다. 그렇다 해도 손님은 손님이니 무례하게 굴 수가 없다. 마감은 항상 내 몫이기에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늘도 열 시 삼십 분경에 손님이 들어왔다. 나는 손님을 맞으러 나가는 직원에게 꼭 물리치고 오라고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역시 자리에 앉고 만다. 남녀 한 쌍으로 옷차림이나 외모는 평범하다. 여자는 베이지 색의 바바리를 걸쳤고, 남..
나는 때때로 가을날 휴일 오후의 공원을 떠올린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투명하고, 풀 냄새가 나는 공원이다. 잔디밭이 눈 닿는 데까지 넓게 펼쳐져 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희미하게 열차소리도 들린다. 나무 그늘이 비껴 간 벤치에 앉아 여자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녀의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과, 발 밑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에 관한 얘기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땐 잘 모른다.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엔 나 혼자 그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대부분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내 옆에 앉아서 담배를 나눠 피기도 한다. 뭐라해도 모두가 행복한 가을날의 공원인 것이다. 이제 그 시절의 일을..
술을 한잔 했습니다. 같이 있던 여자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조금 밤거리를 걸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그냥 걸어본 것이 말이죠. 그래요, 예전에는 참 많이도, 술을 먹고 밤거리를 걸었더랬죠. 옆에 누군가 있는 경우도 있고, 저 혼자 괜히 그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거나, 또는 떼를 쓰듯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내가 그리로 갈 테니 나오라고, 그렇게 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가슴 설렙니다. 오늘은 갈 데가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여러 가지 것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또... 슬픔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래요, 저는 조금 슬퍼졌습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저의..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어떤 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사라지므로, 때로 사람들은 그것을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것들은 그 반대로, 사라짐 그 자체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과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 또 어떤 것들은 사라지기를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서,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안도와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어찌되었든,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난 뒤 - 모든 영원하지 않은 것, 모든 번잡한 것, 모든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 모조리 사라지고 난 뒤, 마침내 드러나는 것이 세상의 참모습은 아니다. 이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사라짐’이 이미 세상에 속해 ..
“때로 나는 진실을 발견했다고 믿었어. 그리고 그건 실제로 진실이었지.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론 만일 그것이 진실이기만 한다면, 그 가치에는 절대성이 부여되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하다고 이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야. 거기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어. 똑같은 진실이고, 똑같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지만, 그래서 때로 기쁘고 때로 가슴 아프지만, 어떤 것들은, 그러니까 어떤 진실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고, 바로 그때가 죽을 때지. 그것은 그때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거야. 가장 중요한 진실은, 언제나 가장 늦게 알게 되지만, 결국에는 가장 빠른 셈이지.” - 손톱깎이 중에서 - ..
가아프가 상상을 시작하기만 하면 항상 피투성이 볼보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던컨이 비명을 지르고, 바깥에서 헬렌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또 누가. 그는 운전대에서 몸을 비틀어 운전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으로 던컨의 얼굴을 잡았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고 가아프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다 확인하기가 불가능했다.“괜찮아.” 그는 던컨에게 속삭였다. “넌 별일 없을 테니까 조용히 해.” 하지만 혀를 다쳤기 때문에 말은 안 나오고, 부드럽게 피만 뿜어대었다.던컨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고, 헬렌도 소리를 질렀으며, 또 누군가, 꿈을 꾸는 개가 그러듯, 자꾸 신음을 했다. 하지만 가아프로 하여금 그토록 무서워하게 만든 소리는 무엇이었던가? 또 무슨 소리가?“아무렇지 않으니까 내 말 믿어, 던컨.”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