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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정직하게 얘기해서, 세상에 여러 가지 행복이 있지만, 분명히 그 안에는 소위 ‘미인을 바라볼 때의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 행복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때의 행복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요소(성적이거나 상상적인)들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건지, 나로서는 쉽게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것은 분명히 ‘바라봄’의 행복이다. 이것을 ‘여성을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남성주의, 또는 속물근성이라고 매도하면 곤란하다. 뭐,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 정신이나 의식,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러니까 내가 남성주의의 화신이든, 결코 상종해서는 안 될 속물이든, 나는 최대한 정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물론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운(運)도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운이란 단순히 복권에 당첨된다거나,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가까스로 넘겼다든지 하는 게 아니다. 표를 사는데 자기를 마지막으로 매진되었다든지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나는 운을, 우리의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미치는 모든 알 수 없는 힘이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운의 한자어 그대로, 그것은 일견 우리와 상관없이 하늘 위에서 빙빙 도는 행성의 궤도 같은 것으로,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분명히 우리에게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것들, 이런 것도 운에 속하는 일이다. 미인으로 태어나는 일이, 잘은 모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그렇게 큰 행운은 ..
내가 지금보다 더 젊었을 시절,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 하나하나의 삶을 볼 수 있게 되고, 또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대학 1학년 시절, 나는 동기들과 여름방학 동안 여행을 갔었는데, 우리는 어느 날 밤 ‘진실게임’을 했었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비록 그것은 말 그대로 ‘게임’에 불과했지만, 첫키스의 시기나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장난 같은 질문이 초반에 몇 차례 이어지고 나서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우리들은 정말로 ‘진실’같은 것들을 얘기하게 되었다. 아마도 여행과 맥주와, 새까만 밤하늘의 별과, 고요함,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러한 분위기로 이끌었을 것이다. 이제 그 자리에 있었던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신입생들은 벌써 서른이거나 스물아홉이 되었..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게 인생이라고? 뽕짝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함성호, 너무 아름다운 병 中- * 아, 술먹고 싶어라. 근데 여기서 '술이나 쳐'는 무슨 뜻일까요? '술이나 쳐먹어라.'의 뜻인지, 아니면 '술을 치워라.'라는 뜻인지, 아니면, '술잔을 마주쳐라.'라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마지막 시구가 제 가슴을 확 움켜잡는군요. '또 봄이잖니.' 그래, 그래. 또 봄이라고. 미치겠네.
취침시간이 늦어지면서, 역시 기상시간도 점점 더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젯밤에는, 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곱시경에는, 자명종 대용으로 맞춰놓은 라디오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아홉 시 반, 라디오 소리에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았습니다. 내가 왜 일어났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몸은 이미 알고 있는데, 머리는 바보같이 모르고 있습니다. 구두방에 가서 벨트 구멍을 뚫었습니다. 원래부터 헐거운 벨트라서 진작에 구멍을 몇 개 더 뚫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까지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게 언제부터일까? 4년이나 되었습니다.농담이 아닙니다. 그것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벨트에는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
며칠 전, 햇빛에 눈이 부셔 이마 위로 손가리개를 만들다가, 문득 내가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매일같이 오가던 길이었지만, 그 방향이 서쪽인줄 몰랐던 것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지금껏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저에게 ‘동서남북’같은 방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보다, 전철역 방향인지, 학교 방향인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문득 그 방향이 서쪽이란 걸 알게 되자, 많은 것들이 달라보였습니다.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진 것처럼 느껴졌고, 또 이상한 일이지만 굉장히 좁아진 것처럼도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첫 문장을 썼습니다. ‘오후 여섯시, 우리는 서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원고지 13매 정도의 아주 짧은 분량입니다. 사실, 이것..
오늘도 날씨가 참 좋습니다. 지금 저는 마루로 나와, 커다란 창을 앞에 두고 이 글을 적고 있습니다. 창문을 아주 조금 열었습니다. 창밖으로는 낮은 빌딩들과, 옥상의 안테나, 노란 급수통 등이 보입니다. 안테나들은 마치 살을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보입니다만, 이건 진부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진부하지만, 정말 그렇게 보입니다. 또 어떻게 보이냐면, 새로 개발된 미사일처럼도 보입니다. 긴 세로줄에 엇갈리듯 좌우로 뻗은 가로줄들이 마치 목표물을 정확하게 찾아내기 위한 첨단 센서거나, 적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히기 위해 목표물 가까이에서 순식간에 좌우로 분리되어 터지는 소형 미사일들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진부한 비유입니다. 안테나는 그냥 안테나인 겁니다. 잔에 담긴 커피는 아직 따뜻합니다. 그런데도 오늘은 기..
이번 작품은, ‘두 개의 문장’에서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는, ‘신호대기에 걸렸다.’였고, 다른 하나는 작품의 후반부에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신호대기에 걸렸다.’라는 문장이 제 머리에 맴돌았고, 그렇게 시작하는 소설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다른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화면에 ‘신호대기에 걸렸다.’를 쓰고, 새로 떠오른 문장은 그 밑에 써놓고, 엔터키를 눌러 화면 밑으로 내렸습니다. 과연 내가 그 두 번째 문장을 포함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일종의 시험 같은 기분으로 문장들을 써나가서, 결국 그 문장을 포함하는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굉장히 근사한 경험이었습니다. 분명 또, 연애얘기냐, 지겨워하실 분들이 있으리라 예상하지만, 제 딴에는, 나름대로 ‘스타일리쉬’한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