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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이런 말 이런 곳에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족을 믿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 가족 구성원들을 믿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저 ‘가족’을 믿지 않는다. 가족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족’에 대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그저 알 수 없는 것, 그리고 또한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소설은 ‘가족’ 소설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90년대 여성작가들의 ‘가족’ 소설이다. 가족에 대해 무엇을 말할 게 있는가? 그것은 아마 내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치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몇 살 때였는지 나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또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지도 않지만,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
즐거운 일은 어째서 끝나는 걸까? 그건 슬프고 괴로운 일이 끝나기 위해서야. 하지만 내가 정작 궁금한 건, 즐거운 일이 끝났을 때, 또 슬프고 괴로운 일이 끝났을 때, 우리는 그 이전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다. 돌아가기나 할 수 있는가 이다.
누군가에게 뭔가 무척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이 꼭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 그 말들은 대개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반대로 어떤 소용이 닿는 말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체 말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나는 집착이 강한 편이다. 남들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들을 개인적으로 잘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만, 집착에 관한 한 내 자신 잊지 않기 위해 되새기고 경계하는 실정이라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집착이 강하다. 남들이 믿든 안 믿든, 실제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란 인간을 그렇게 여기든 여기지 않든, 이건 내 문제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몇 가지의 확실한 사례를 끄집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 (그게 몇 살 때였지?) 나는 스스로에게 많은 일들에 대해 무관심해지길 바랐다. 무관심해지기. 이것은 내 삶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일들에 대해 무관심해질수록 내 자신이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느꼈다. 이전에도 한 번 말했..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중 고등학교 시절 분명 나 역시 꽤나 낭만적인 인간이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당시 내가 알고 있는 세계는, 아주 단순한 단어의 조합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아주 단순한 문장이었고, 또한 완성된 문장이었다. 하나의 단어는, 그 단어만큼의 무게를 가지며, 다른 단어와 뚜렷한 경계를 가지며, 순수한 것이었다. 결코 다른 것이 섞여들 틈이 없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또 내가 해야 할 것은, 그 단어의 진실한 뜻이었으며, 그 단어의 진실한 실천이었다. 가령, 용서, 평화, 이해, 사랑 …. 또 죽음, 절망, 고통, 슬픔. 그 모든 단어들은 나를 향해 순수하게 열려 있었으며,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 나이가..
장갑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매해 겨울, 장갑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장갑을 사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장갑을 끼고 겨울을 보낸 것은 아주 어렸을 때나, 군대 시절밖에 없습니다. 분명 장갑을 끼면 손이 아주 따뜻해집니다. 손이 시린 걸 제가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는 장갑을 사지 않는 걸까요? 언젠가는 분명 장갑을 끼게 될 겁니다. 제가 장갑을 사지 않는 데 별 이유가 없는 것처럼, 어느 날 문득 장갑을 사는 데에도 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장갑을 끼고 겨울 거리를 걸으면서, 제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사실도, 또 오랫동안 제가 장갑을 끼지 않고 겨울을 보냈다는 것도 ..
1. 사람들은 대개 어떤 결과를 두고, 그 결과를 이끈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이유,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마치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처럼 말이다. 그건 분명 맞는 말이다.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언제나 ‘원인(cause)’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모든 게 ‘문제(trouble)’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어떤 결과가 발생했을 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타당한 원인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원인들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어떤 결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언제나 그 결과, 그 일이 발생했을 때만, 원인으로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해답이 된다. 여기서 ..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나는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다. 잠시 서로 말이 없다가, 문득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올 가을 들어 가장 많이 낙엽이 떨어지는 날이군.” 나는 몸을 돌려 선생님이 바라보던 가게 바깥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저 ‘예’하고 대답했다.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나무 가지가 가르쳐주는 바람의 방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며칠 간 겨울이 온 듯이 추웠다. 사람들은 이미 겨울이 왔다고 느꼈다. 그러다 어제부터 날씨가 풀렸다. 그리고 오늘 나뭇잎들이 바람에 떨어진다. 그 방향이 어디든, 불어오는 것은 그저 바람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생각은 문득 떠오른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비유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것은 바람일 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