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03/04 (6)
시간의재
얼마 전에 티브이에서 일일 드라마를 보는데, 거기에 아주 착한 며느리가 나왔습니다. 매일매일 빠트리지 않고 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니, 거의 언제나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본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줄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이야기만 어렴풋이 알 뿐입니다. 시어머니는 아주 못돼서, 처음에 그 착한 며느리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날 정도로 구박을 합니다. 거기에는 또 어떤 사연이 있을 테지만, 아무튼 그것은 사뭇 전형적인 내용에 불과합니다. 말 그대로 일일 드라마다운 내용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시어머니가 다치게 되고 거동을 못하게 됩니다. 매일 구박만 당하던 며느리는, 너무나 착했기 때문에, 또 병든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합니다. 시어머니는 그런 며느리의 진심을 ..
라디오를 듣다가, 디제이가 비가 그쳤다고 하더군요.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창문을 열고, 비 그친 새벽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담배도 한 대 피고, 캔 맥주도 마시고, 이런 저런 생각도 했습니다. 알아요? 우리가 정말로 안타깝고, 슬퍼해야 하는 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배반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밖에 배울 수가 없는 겁니다. 마치 고통 그 자체가 진실인 것처럼, 그것이 무언가를 증명할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흔히 잘못을 가르쳐주지만, 그러니까,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 받는 거야, 라고 생각하게 하지만, 사실 진짜 우리의 잘못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
이제 작품을 올렸는데, 고백하자면 사실 이것은 새작품이 아닙니다. 파일의 문서정보를 보니까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건 2002년 3월 6일로, 작품의 순서를 보면, ‘서쪽으로 난 길’을 쓰고 나서, 그리고 ‘커피 잔...’을 쓰기 전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완성했지만, 영 아닌 것 같아서 올리지 않은 작품입니다. 한 일주일 전에, 하도 지금 붙들고 있는 소설이 안되길래 이거라도 대폭적으로 수정을 해서 구제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끙끙대며 조금씩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젯밤 저의 편집자(?)가 읽어보더니, 이대로도 괜찮다, 다만 앞부분만 날려버리라고 했고, 충고대로 그렇게 하고 보니, 훨씬 나아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길게 설명을 했는데, 결론적으로 얘기해서 작년의 그것에서 거의 ..
“나는 서른 살입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자기를 속이고 또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기에는 내 나이가 다섯 살이나 더 먹었어요.”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 중의 하나는 크리스마스 때 대학 예비학교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으로부터 서부로 돌아오는 일이다. 시카고보다 더 멀리 가는 자들은 12월의 어느 날 저녁 여섯 시에, 시카고 친구들과 함께 고색창연한 유니온 역에 모이는 것이었는데, 벌써 휴가의 즐거움에 들떠 조급히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나는 미스 아무개 학교에서 돌아온 아가씨들의 털외투를 기억하며, 입김을 뿜으면서 지껄이던 것, 아는 친구가 눈에 띄면 머리 위로 흔드는 손들, 가는 곳을 서로 물으며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가자고 하는 소리들 - “넌 오드웨이로 가니? 허시로? 슐츠? 하고 외치던 소리들과 그리고 우리의 장갑 낀 손에 꽉 움켜진 기다란 초록빛 차표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카고, 밀워키, 세인트 풀 ..
어떤 말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은 때로는 굉장히 오랜 시간일 수 있는데, 새삼 그 말의 의미를 절감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말이 특별히 어렵고 의미심장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명확하고, 판에 박은 말일 수도, 또 굉장히 유치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흔한 말이고, 말해놓고 나면, 그게 뭐야,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이 되면, 새삼 ‘절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는, 작년 가을 방영되었던 티브이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대사입니다. ‘내가 뭐해줄까요?’ 이것은 극중 여자 주인공이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자(좋아해도 되요?), 남자가 그 대답으로 한 말입니다. 물론 그때도 참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멋진 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