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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방콕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그리고 또 대만에서는, 약 한 시간 정도 비행기에서 내려 대기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파리에서 한국까지 걸리는 시간은 총 열 여섯시간 정도. 대만에서 다시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후배의 창가자리를 뺐었다. 대만에서 한국까지, 두 시간 내내 나는 창 밖을 보면서 왔다. 기내음악으로 한국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 년도 전의 노래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던 노래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대개의 노래들은 내가 아는 것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구름은 멋지다. 더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짙은 청색의 바다 위로 구름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기는 다시 파리다. 오후 1시쯤에 도착해서, 같이 온 일행과 간단하게 차를 마시고 헤어졌다. 형네 집으로 와서 씻고 밥 먹고, 메일을 확인하고 내가 알고 있는 게시판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시간쯤 산책을 했다. 날씨는 뜻밖으로 쌀쌀해서 거리에서 반바지에 반팔 티를 입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마치 가을 날씨 같았다. 벤치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너무 멀리까지 걸어 나온 것 같아 되돌아 걸었다. 그러나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다. 나는 그다지 멀리까지 걸어 나오지 못했다. 다시 밥 먹고 읽을 책이 없어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었다. 3년 전에 역시 파리의 형네 집에서 읽었던 것인데, 처음 보는 책 같았다. 형이 방에 들어가고 이번에는 찬찬히 게시판의 글들을 읽었다. 생각보다 내가 알..
도시는 어디나 비슷비슷하다. 잘 사는 사람들이 있고, 거지가 있다. 젊은이들, 늙은이들, 경찰들, 범죄자들, 연인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 다, 우울한 풍경이다. - 마드리드
파리다. 이상한 일이다. 파리에서는 파리 냄새가 난다. 항상 기억이란 것은, 그것이 감각적으로 반복되었을 때 깨닫게 된다.
비닐에 덮인 소파, 거실을 가득 메운 오전의 하얀 햇살, 햇살 속을 고요하게 떠다니는 먼지, 담배 한 대, 맨 발, 액자가 떼어진 텅 빈 벽의 얼룩들, 그 자리에 대체 뭐가 걸려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빈자리들, 기억, 고통.
나는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른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 때면, 악보를 잘 읽을 줄 몰라서, 미리 음계를 직접 행간에 적어두곤 했다. 한 칸 한 칸 손으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꼽으면서 꽤 긴 노래 전부의 음계를 기입하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곧잘 음악선생은 무작위로 학생을 일으켜 세워서 음계로 노래를 시키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을 전문적으로 듣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고등학교 시절 내가 아는 녀석은 락 매니아여서 락커들의 이름을 줄줄 꾀고, 그 가사까지 다 해석해서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클래식이든, 재즈든, 어느 것에도 나는 그다지 흥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음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음악 듣는 것을 참 좋아한다. 술이라도 잔뜩 마시고 ..
난 자주 나에게 어떤 시간들이 사라졌음을 느낀다.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는 법.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어떤' 시간이다.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차를 몰고 새벽의 거리를 달린다. 여자의 집에서 우리 집까지, 약 이십 분 정도 걸렸다. 난, 차를 파킹시키고, 시동을 끈다. 시간은 일정해서, 언제나 열 두시 이십 분에서, 사십 분 사이 정도. 난 혼자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조금 더 듣는다. 이전에는 없던 버릇이다. 난, 라디오를 즐겨듣는 사람이 아니었다. 라디오의 프로그램은 다양했다. 사연을 읽어주기도 하고, 직접 청취자와 전화통화를 하기도 한다. 패널이 나와서, 진행자와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오면서, 그녀 생각이 났다. 갑자기, 그 라디오 ..
요근래 자주 나쁜 꿈을 꾼다. 꿈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나쁜 꿈이었다는 느낌만은, 잠에서 깨어나고도 오랫동안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머리가 이상하다. 두통과는 다르다. 아프지 않다. 조이는 것 같고, 잡아당기는 것도 같다. 자는 동안 누군가 내 머리를 두고 심한 장난을 친 것 같다. 수학여행이나 단체로 떠나는 여행에서 자는 동안 친구들이 벌이는 장난처럼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기분이 몹시 나쁘다. 지금껏 삶을 긍정하면서 살아왔다고 믿었다. 고민에 빠져있는 친구에게는, 너는 엄살을 떨고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자기 합리화이거나,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점이니 입장이니, 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