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01/06 (14)
시간의재
오랜만의 비다. 창문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고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얼굴을 가린 우산의 행렬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작은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가만히 바라보니, 빗방울 때문이다. 새로 산 테이프의 비닐껍질을 벗겨 카세트 데크에 꽂아 넣는다. 볼륨을 조절한다. 오후.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이미 어떤 하나의 일이 끝난 뒤에, 아니 바로 그것이 끝나자마자, 어쩌면 바로 끝났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을 때다. 가령 전화를 끊자마자 내가 상대방에게 그런 식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얘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다. 그렇다고 도대체 다시 전화를 걸어 그게 아니라 이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미 그 일은 끝난 일이다. 그것은 봉합되었고, 굳어졌다. 나는 안절부절한다. 몹시 불쾌하고, 안타깝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이런 식' 아니라 이미 행한 '그런 식'이 오히려 내 자신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그것이 되돌아 생각해서, 참 어리석고 부끄러운 행동이라 해도, 그것이 본래의 나다. 단순하게 ..
'나는 이 말을 아주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라는 문장이 있다. 이건 오늘 내가 누군가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문장이다. 그 사람은, 그 글을 '나누고 싶은 글'이란 곳에 올렸고, 그렇게 해서 나는 나눔을 받은 셈이다. 위의 문장의 주인공을 나는 이미 몇번이나 말했듯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났다. 그 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이상한 일이지만, 그 때의 나를 떠올리면 육교가 생각난다. 학교는 육교 너머에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육교를 건너 학교를 갔고, 저녁이면 육교를 건너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육교는 아직도 있다. 같은 방향의 친구가 있어서 저녁에는 함께 육교를 건넜는데, 나는 그 친구에게 반복해서 '절에 들어갈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 분명 절에 들어간다는 것에 대..
환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환상 이외의 달리 무엇과 싸워야만 한단 말인가?
고등학교 때 쓰던 연습장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지 않았는데, 그게 어디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 문장을 반복해서 쓰던 연습장이었다. 그리고 그 여백에, 그 뒷장에 문장을 적었다.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 때에도 나는 내가 뭐라 이름 붙일만한 것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같기도 하고, 그냥 짧은 단상같기도 하고, 일기같기도 했다. 때로 편지이기도 했다. 아니면, 언제나 완성되지 못한 소설의 서두였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나는 틈나는 대로 그것을 적었고, 연습장을 다 쓰고 나서도 버리지 않았다. 그 중 몇 개의 것들은 서클의 시화전에 출품하기도 하고, 또 몇 개의 것들은 고등학교 교지에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실었다. 그러니까 그건 정말로 시도 되었다가, 수필도 되었..
봤어? 날씨가 구질구질해. 잊어버려. 내가 잘못한 거지? 그 말은 네가 편해지기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