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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계절이 바뀌는 것은 멋지다. 나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조금 바깥으로 내밀어본다. 햇빛은 눈이 부시고, 나뭇잎은 짙은 초록빛깔을 띠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출렁인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반팔이거나 민소매 차림이다. 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진뜩한 땀을 손바닥으로 훔친다. 나는 내가 중학교 시절 보았던, '라밤바'라는 영화를 떠올린다. 항상 여름이면 그 영화를 떠올린 건 아니지만, 내가 지금 그 영화를 떠올린 건 여름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마 파랑이거나 초록인 세로 줄무늬 반팔 티를 입고 극장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다. 극장은 충무로의 대한 극장이다. 친구와 나는 동작역에서 전철을 타서 충무로역에서 내렸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그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해 두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한..
책장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꽤 눈부신 햇빛이었다. 열차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나는 잠깐 바깥을 내다본다. 벌써 여름이 온 것처럼 세상이 하얗다. 다시 펼쳐놓은 책으로 시선을 내리다가, 열차가 달리는 철로와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 사이, 다리의 틈으로 강물을 본다. 강물 위에도 햇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씩 출렁거리는 강물은 녹색 빛이다. 바다가 푸른 것은 하늘 빛 때문이라고 한다.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동해가 더 푸르른 것은 염분 때문이라고 한다. 강물이 녹색인 이유는 알 수 없다. 물 속에 녹색 부유물 같은 게 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득 물 비린내를 맡았다고 느낀다. 실제로 맡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열차가 완전히 밀봉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바깥의 냄새가 열차 안에까지 들어올 ..
과거를 생각하며 현재를 허비하는 따위의 짓은, 올바르지 못하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올바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누가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설혹 올바른 삶이 존재한다 해도,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는가?
희망은 편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근거 따위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움이 없다.
어머니는 아이의 조그만 손에 5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으로 요 앞 슈퍼에 가서 네가 먹고 싶은 걸 사먹으렴." 아이는 뛰었다. 그리 멀지 않은 슈퍼에 도착했을 때, 어찌나 꼭 쥐고 있었던지 동전은 땀으로 미끈거렸다. 아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포장지가 예쁜 과자 한 상자를 골라 카운터로 갔다. 그리고 말 없이 동전을 아줌마에게 내밀었다. "얘야, 이 돈으로는 이것을 살 수 없단다. 다른 걸 골라오렴." 아줌마는 친절하게 아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그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분명히 네가 먹고 싶은 걸 사먹으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틀렸을 리가 없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도 아줌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자, 거센 바람이 느껴졌다. 바람은 아주 무겁고 두터워서, 내 손을 뒤편으로 날려버릴 것 같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손목에 힘을 주었다.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를 통과하자 지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가 금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것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겠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살고 있다. 잘못 살고 있다.
재밌지. 나란 인간은 말야, 항상 미리 준비해 놓는 단 말야. 지금 이곳이 싫다고, 뛰쳐나가고 싶다고, 도망치고 싶다고, 떠나버리고 싶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러면 어디로 가지, 머리 속으로 궁리한단 말이야. 그런 건 도망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냥 이동일 뿐이야. 도망치고 싶어서, 하루 종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열차시간표를 확인하고 있다니. 남은 통장의 돈을 세고 있다니. 카드로 빌릴 수 있는 한도액을 합쳐보고 있다니. 그만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