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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아름다운 것

물고기군 2000. 8. 18. 18:00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약 두 달간 대대 상황실에서 근무를 했던 적이 있다. 그 후 여러 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서 결국 나는 다시 중대로 내려오게 된다. 육체적으로는 분명 상황실 근무가 천국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중대 쪽이 훨씬 편했던 것 같다. 그렇더라도 대대 상황실의 근무란 게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한없이 한량했던 게 사실이다. 대대장과 작전장교가 상급부대로 들어가서, 눈치볼 사람이 없는 날은 더욱 그렇다. 

오전에는 사다리를 타서 먹을 걸 사온다. 따근하게 데운 만두와 꼬꼬볶음이 주메뉴고 음료수와 과자까지 한 박스 가득 담아온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는 다들 나른해져서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짬밥이 되는 고참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곤하게 잠을 잔다. 상황실에서 나와 왼쪽으로 십 미터쯤 걸어가 건물을 타고 돌아서면 그 곳이 내가 항상 담배를 피던 곳이었다. 서늘한 벽면에 몸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깜박깜박 졸기도 한다. 사방이 모두 산이었는데 바로 앞에는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어서 지면에 듬성듬성한 그늘을 만들었다. 바람이 장난이라도 거는 것처럼 그늘을 자꾸만 흔들었다. 그러나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상황실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다. 라디오에서는 나른한 오후에 걸 맞는 조용한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노래 중간 중간에 디제이가 여러 가지 사연들을 읽어준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내가 군대에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들과 나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그러나 이곳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이곳에도 여전히 시원한 바람이 불고, 나무들은 푸르고, 햇빛은 따사로운 걸. 정적을 깨고 가끔씩 전화벨이 울린다. 첫 번째 벨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잽싸게 수화기를 들고 말한다. '통신보안 지휘통제실 일병 김종옥입니다.'

오후에 문예백일장의 상장을 만들기 위해 복지회관 5층의 문화사에 갔다. 사무실은 폭이 좁고 길어서 양쪽 벽면에 책상을 붙여놓자 그 사이로 지나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한 사람이 의자를 책상 쪽으로 바짝 붙여야 했다. 여직원이 둘 있었는데, 둘 다 열심히 워드작업을 하고 있었다. 창에는 햇빛 때문인지 몽땅 셀로판지를 발라놓아서 한 낮인데도 형광등을 환하게 켜놓았다. 상장의 문구배열과 글자모양을 확인하기 위해 한 삼십 분 정도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사장님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직접 여직원의 옆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하나 하나 세심하게 작업을 지시했다. 가끔 시시껄렁한 농담을 걸기도 하면서. 벽면에는 커다란 시계가 걸려있다. 아마 퇴근시간이 가까이 오면 직원들은 몇 번이고 저 시계를 힐끔힐끔 볼 테지. 애인과 약속이라도 있는 날에는 더욱 신경이 쓰일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커다란 거라고 생각하자, 괜히 시계가 정겹게 보였다. 안쪽에 앉은 여직원이 쓰고 있는 키보드는 색깔도 검었고 사뭇 다르게 보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워드를 치고 있는 손이 빨랐다. 몇 번의 수정작업을 거치자 과연 처음보다 훨씬 상장 모양이 예쁘게 나왔다. 원래는 문구만 전해주고 바로 나올 생각이었다. 이 정도로 신경을 써주니 고맙다고 하자, 이렇게 하는 것이 일하는 쪽도 더 편하다고 사장은 말했다.

학과사무실까지 걸어오는 길, 8월도 중순이 넘었는데 여전히 햇빛이 따가웠다. 나는 담배를 물고 잠시 멈춰 서서 노천극장을 내려다보았다. 스탠드에는 그늘을 찾아 두 서너 팀의 학생무리가 노곤하게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상하게 날이 맑아서 여러 가지 것들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진 뒤의, 그런 선명함이었다. 대대장과 작전장교가 없는 한량한 대대 상황실, 저 혼자 떠드는 오후의 라디오, 여러 가지 사연들, 사무실의 커다란 벽시계, 워드 작업, 시시껄렁한 농담들. 나는 이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몰라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소중한 것, 아름다운 것, 가치는 없을지 몰라도 오래 간직하고 싶은 것, 이런 것들 말이다. 그것을 가지고 뭔가 다른 일을 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자랑할 수도 없고, 어쩌면 이해시킬 수도 없다. 나는 그저 '어때, 정말 아름답잖아.'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뭐가? 뭐가, 아름다운 거야?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가리킬 수조차 없다. 가리키는 순간, 그것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제 비가 왔었는지도 몰랐는데, 무지개가 떴다. 동그란 반원의 왼쪽 편은 희미한데 비해, 오른편은 놀라울 정도로 뚜렷했다. 그래서 무지개가 내린 집들은 그 빛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무지개가 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기둥처럼 보일 것이다. 문리대 앞 벤치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무지개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창을 열고 소리쳐 알려주고 싶었다. '이봐, 무지개가 떴다고.' 정말이다. 무지개가 떴다. 물론 금방 사라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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