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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눈길을 걷기 본문

단상

눈길을 걷기

물고기군 1999. 12. 26. 06:17
눈길을 걷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건 눈길을 걸어본 사람이 안다. 특히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포인트는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없는 노릇이고, 단지 종래 양발에 실었던 신체의 하중을 위쪽으로 끌어올려, 무게를 분산시키는 것을 뜻한다. 눈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게다가 몇 번이나 넘어져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러한 방법을 깨닫고 행하게 된다. 자, 이제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미끈거린다면 재빨리 다른 발로 무게를 옮길 수 있게 된다. 아주, 날렵하게 발을 놀리면서, 그러면서도 결코 허둥대거나 펄쩍 펄쩍 뛰어선 안 된다. 말 그대로, 사뿐사뿐 걸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포인트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마음가짐이다. 즉, 미끄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눈길이 미끄럽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든 몸이 중심을 잃고 넘어질 수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우린, 눈길이 아닌 길을 걸을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린 걷는다는 것에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로 간다든지, 혹은 마주 오는 사람들의 얼굴이라든지, 옛 생각을 하거나, 별로 시덥지도 않은 고민에 빠져 무의식중으로 발을 놀린다. 하지만, 눈길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마음속에 코텐션 마크를 치고, 이런 문장을 집어넣어야 한다. '난 넘어질 수 있다. 넘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길을 걷기에 나는 너무 무겁고, 내 신발 밑창은 닳아 맨들맨들하다. 난, 눈길을 걷고 있다.'

엄숙해져야 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넘어지기 위해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미끄러지기 위해서. 그러면 넘어지지 않는다. 그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리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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