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물고기통신 96 - 해질 무렵 서울역 본문
해질 무렵에 서울 역에 갔었습니다. 열차를 타러 간 건 아니었고, 다른 일 때문이었죠.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가 서울 역에서 열차를 타거나 내린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집에서 가까운 고속버스를 이용하거나 MT 때마다 청량리 역을 이용했었죠. 아니면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군에 입대하던 날 논산행 열차를 탔던 기억만은 선명합니다. 어머니가 저를 서울 역까지 데려다 주었고, 그 다음부터 논산까지는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죠. 무궁화 열차를 탔었는데, 좌석 시트가 부드러운 촉감의 붉은 색 우단이었습니다.
다시 찾은 서울 역은 제게 전혀 새롭게 보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달라진 것이죠. 고속철도 개통에 맞춰 현대식의 새 역사가 들어서고, 역 광장의 위치도 달라지고, 길 건너의 고층빌딩들도 새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변화하는 별도로, 그것과는 무관하게 뭔가 달라진 것처럼 느꼈습니다.
저는 편의점에서 생수 한 통을 샀고, 역 앞 계단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웠습니다. 저는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도시를 방문한 승객의 심정을 꾸며보았습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빌딩들의 수많은 창에는 불빛들이 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워지는 하늘에는 여전히 많은 구름들이 보였습니다. 바람이 대기를 맑게 해서, 제가 서 있는 자리로부터 하늘 위 구름까지의 거리를 줄여 준 것 같았습니다. 구름들은 제게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죠.
제가 군에 입대한 날은 4월 7일이었습니다. 어떤 날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어떤 숫자들, 어떤 풍경이나, 어떤 사람들은,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는 것처럼, 한 순간에 환하게 떠오릅니다. 여전히 제가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제 주위에 있었던 거죠. 물론 대개 쓸데없는 기억들입니다. 이제는 걸 수 없는 전화번호고, 사라진 풍경이고,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어쨌든 다 지나간 일들입니다. 모든 게 달라지고, 저는 그 달라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도시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곳이 제가 한 번도 있어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장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사실은 제게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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