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재
물고기통신 94 - 여행 중 인터넷하기 본문
저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인간입니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고,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는 탓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쩌다 별로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여행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참 신기하게도 좋습니다. 물론 떠나오길 잘했다며 손뼉을 치며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고 대개 여행이 끝나거나 거의 끝날 때쯤에야 이건 참 좋은 일이었구나, 슬며시 웃게 되는 정도이지만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여행을 하는 도중에 인터넷을 이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고 약 십 일 정도 지난 뒤였는데, 당시는 제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홈페이지에도 글을 열심히 올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글을 올리고 답글을 받고, 또 거기에 답글을 달고, 또 다른 사람의 글도 열심히 읽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과는 달리 정기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이 있었고, 저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속에 속해 있었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그리고 나의 글과 그들의 글속에 제 자신의 삶의 일부가 담겨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글들을 읽을 수 있고, 그러면 여전히 그 시절의 제 자신의 삶의 일부가 그 안에 자연스럽게 담겨있다고 느낍니다. 저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낯선 도시에서 그 글들을 읽었습니다. 고직 십일 정도 떠나 있었을 뿐이지만 분명 처음에는 반갑고 그리운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읽어나갈수록 저는 아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마치 저의 몸이 두개로 분리되어 하나는 여전히 서울에 남아서 글을 올리며 글 속에 제 자신의 생활과 심정을 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 먼 곳에서 그 글을 읽고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거기에 있으면서, 또 거기에 있는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기묘한 느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불쾌한 느낌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한없이 유치하고 치졸한 인간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자신의 글과 글 속에 담긴 행동들, 드러나는 감정들, 어느 것 하나 구역질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 순간, 저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어떤 말들, 어떤 행동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마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저라는 인간이 점하고 있는 위치,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아무리 세련된 말로 꾸미려고 해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려고 해도, 바로 그게 제 자신이었기 때문에 결국에 그 말들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니라, 그 말들이 출발한 그 지점에 서 있던 제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당장 인터넷을 그만두고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앞서 말했다시피 제게 낯선 도시였습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돌아가는 길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려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길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계속 한 길로만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안 된다. 너무 멀리까지 나왔다고 느꼈습니다.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저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먼 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멀리까지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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