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물고기통신 70 - 2002년 겨울 첫눈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70 - 2002년 겨울 첫눈

물고기군 2002. 12. 31. 01:47

눈이 내립니다. 저녁에 카페에서 일을 하다, 잠깐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왔다가 눈이 내리는 걸 처음 발견했습니다. 주차된 자동차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을 보면서, 제가 모르는 새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제가 모르는 동안에 조금씩 쌓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눈을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마치 깜짝 파티 같은 기분이 듭니다. 숨어 있던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축하해, 축하해, 소리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멋쩍게 머리를 쓸어내립니다. 이 눈이 올 겨울 들어 몇 번째 눈인지 알 수 없지만, 제게는 마치 첫눈 같았습니다. 2002년 겨울 첫눈은 12월 30일 날 내렸다고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카페를 마감하고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 친구는 제 고등학교 때 친구입니다. 벌써 10년이 훨씬 넘었군요. 최근에는 자주 보지 못했는데, 오늘 오후에 문득 전화를 걸어 카페로 오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손님들이 하나도 없는 텅 빈 카페에 앉아, 항상 그렇듯이 음악 한 곡을 반복으로 해놓고 볼륨을 한껏 높인 채, 친구를 기다렸습니다. 제가 직접 뽑은 커피를 마시면서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을 구경했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커피는 정말 맛있었고, 가로등불 아래로 반짝이는 눈은 정말 예뻤습니다. 카페의 정원에는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 전구가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순간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첫눈, 마감을 끝낸 텅 빈 카페, 오래된 친구, 커피, 음악, 크리스마스 전구. 정말 깜짝 파티지 뭡니까? 이렇게 해서 나의 서른 살도 끝이 나는구나. 모두들 이렇게 내 서른 살의 마지막 날(실제로는 하루가 더 남았지만, 역시 이 날을 마지막 날로 정했습니다.)을 축하해 주는구나. 축하해, 축하해, 저는 다시 한번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쓸어내립니다.

돌아보면 지난 1년, 저의 서른 살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고백하자면 실상 저는 대학원을 휴학한 채, 정말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 1년을 보냈습니다. 처음 올해를 시작할 때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늦은 나이에 가질 수 있게 된,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감사했고, 또 그만큼 올해가 끝날 때에는 뭔가 가시적인 결과물들을 내놓아야 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게는 부끄럽게도 아무 것도 내어놓을 게 없습니다. 적어도 누군가 나에게 지난 1년간의 성과물을 내어놓으라고 한다면, 그 앞에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올 한해처럼 제게 소중한 해는 없었다고 말이죠. 그래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죠. 올 한 해 동안 제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하고, 올 한 해 동안 제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그 일과, 그 사람들을 통해 정말로 소중한 것들을 배웠고, 그렇게 해서, 제 서른 살의 마지막 날, 저는 마땅히 축하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제가 뭔가를 선택해서 어떤 행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역시 여러 잘못들을 저지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지난 1년 저는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말입니다. 저는 이제 그것들을 정직하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몸에 스며들게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줄곧 ‘유대’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세상과의 유대.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저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해서 가능할 것인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제 자신과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입신양명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제 자신이 이제 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제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겠다는 뜻입니다. 과연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굉장히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이 생각만 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결국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도울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운이 따라준다면 잘 될지도 모릅니다. 간절히 바라건대,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마시기 시작했던 맥주를 이제 다 마셨습니다. 한 캔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냉장고에는 더 이상 맥주가 없군요. 고민 중입니다. 맥주를 한 캔 더 사올까? 사실 오늘 저녁에 저는 굉장한 미인에게서 새해 인사를 받았습니다. 열심히 음료를 만들고 있는데, 문득 저기요 하기에 고개를 들었더니, 그녀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더군요. 저는 우물쭈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인에게서 듣는 새해 인사 같은 거 상당히 기분이 좋습니다. 비록 저는 미인은 아니지만, 미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buttercup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금까지 물고기통신의 물고기군이었습니다.

*첨부된 음악은 Kevin kern의 Return to love입니다. 아까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면서 반복해서 들었던 그 음악입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였던가요? 하여간 좋군요.



'물고기통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고기통신 72  (0) 2003.01.21
물고기통신 71  (0) 2003.01.11
물고기통신 69  (0) 2002.12.23
물고기통신 68  (0) 2002.12.23
물고기통신 67  (0) 2002.12.19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