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물고기통신 69 본문

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69

물고기군 2002. 12. 23. 23:52
‘테스’라는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중학교 때 읽었는데요, ‘그레이트 북스’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이었습니다. 판형이 현재 나오는 소설책보다 작고, 세로쓰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법 긴 소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읽기 시작하자 도저히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거의 밤을 새워 읽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밤, ‘테스’라는 소설을 읽고 있는 저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읽는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 책을 책상 위에 엎어 놓고 화장실로 갑니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제 얼굴을 바라봅니다. 이미 늦은 시각이라 가족들은 모두 잠이 들었고, 사방은 고요합니다. 멀리서 빠른 속도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다시 노란색 스탠드 등만 달랑 켜진 어두운 제 방으로 돌아가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줄거리는 거의 기억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 중 제가 기억하는 이름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테스’ 뿐입니다. 몇 몇 장면들만 머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테스는 아마 목장에서 일을 했던가요? 젖소의 젖을 짜는 일 같은 것? 잘 모르겠습니다. 문틈에 편지를 끼워 넣은 건 누구였죠? 두 남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테스는 둘 중 한 사람을 택하게 되죠. 결국 누구를 택했는지, 그렇게 해서 테스는 어떻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안돼, 그러지마’라고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소리쳐야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감정이입이 되어서 읽었던 책은 ‘테스’뿐입니다. 그건 아마 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긴 더 어렸을 적, ‘플란더스의 개’를 읽을 때도 그 심정은 똑같았습니다. ‘넬로’가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고 구박하던 알로아 아버지의 지갑을 주워 돌려 줄 때도 저는 똑같이 ‘안돼, 그러지마’라고 소리쳤던 것 같습니다. 그 돈을 돌려주지 않고 자신을 위해 썼더라면 넬로와 파트라슈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랫동안 울었습니다. 물론 ‘테스’를 읽고나서는 울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주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들은 모르는 걸까? 저는 그 뒤로 다시 ‘테스’를 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물론 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습니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도, 우연히 라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그런 안타까운 심정을 느끼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 안타까움은 착한 사람들이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소설 속의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나 착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을 외면하고 싶습니다. 다만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온전히 착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대체 무엇이 착한 행위인지조차 잘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또 역시 온전히 나쁜 인간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몇 번이나 얘기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러니까 행위의 가치판단이 어느 정도는 상대적이라 해도, 우리는 또한 살아가면서 ‘착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무엇이 착한 행위인지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것을 아는 건 가능한 일입니다. 외면하고 싶지만, 무엇이 옳은 길인지, 우리는 언제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내일 모레는 크리스마스입니다. 기온이 지금보다 낮았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됐겠죠. 비도 그다지 나쁜 것 같지 않지만, 눈이 온다면 더 멋졌을 겁니다. 만일 크리스마스에 제가 무슨 소원을 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소원이 이뤄질 거라고 제가 믿을 수 있다면, 문득 이런 소원을 빌고 싶어졌습니다. 이 세상 착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 나쁜 사람들이 모두 착해졌으면 바랍니다. 그럼 저도 착해질 테니까요. 모두들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물고기통신의 물고기군이었습니다.

'물고기통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고기통신 71  (0) 2003.01.11
물고기통신 70 - 2002년 겨울 첫눈  (0) 2002.12.31
물고기통신 68  (0) 2002.12.23
물고기통신 67  (0) 2002.12.19
물고기통신 66  (0) 2002.12.1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