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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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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식혜

물고기군 2000. 5. 8. 08:25
고백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음료중의 하나가 '식혜'다. 음료란 것이, 목이 말라서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해도, 굳이 어떤 음료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까지 곧바로 이어지는 게 아니므로, 구멍가게나 편의점 또는 음료 자판기 앞에서는 망설이기 마련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통계를 내본 적은 없지만, 당장 이 자리에서 순위를 매겨보자면, 콜라, 파워에이드, 마운틴 듀, 실론 티 등등을 망설임 뒤에 선택하곤 했는데 (최근에는 '이프로'나 '니어워터'도 꽤 맛있다), 이상하게도 '식혜'만은, 음료를 마시고 싶다가 아니라, 곧장 '식혜'를 마시고 싶다로 연결된다. 논리적으로 따져 본다면, '식혜'는 어떤 음료와도 틀리기 때문인 것 같다. 탄산음료도, 과즙음료도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처음 캔으로 나온 '식혜'를 만났을 때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자대 배치를 받고 어머니께서 첫면회를 왔던 날이다. 바로 어머니께서 캔식혜를 사오셨다. 어라, 식혜가 캔으로 나왔네. 아주 잠깐 서울을 떠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잠깐이라는 것이 내가 그 안에 있을 때는 변화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그 변화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법이다.

그 다음, 결정적으로 내가 식혜와 인연을 맺은 건, 어느 날 아침이었다. 전날에 술을 많이 마셨고 여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어느때처럼 목이 말라서 음료를 마셔야 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언제나 별 망설임없이 100% 오렌지 쥬스를 마셨는데, 그날은 유독 다른걸 마셔보고 싶었을 것이다. 구멍가게의 안이 들여다 보이는 음료 냉장고 앞에서 뭘 먹을까 이것저것 눈으로 찍어보다가, 식혜를 골랐다. 그런데, 그게 내 입에 착 달라붙는 것이다. 마치 이온음료 광고의 한 장면처럼, 식혜의 단맛이 온 몸에 빠르게 흡수되어서 술에 절어 감각이 둔해진 손끝까지 뻗쳤다. 분명, 그건 '단맛'때문이었을 것이다. '당분'말이다. 그 때부터, 술 먹은 다음날, 나는 꼭 식혜를 마신다.

사실, 술 먹은 다음날, 남의 집이나 여관에서 잠을 자고, 환해진 아침 거리를 나서는 건, 근사한 기분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생각해보면, 나와 정반대로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다만, 그 근사한 기분을 배가시키는 건, 낯선 거리의 구멍가게에 들어가 차가운 식혜를 사서 뚜껑을 따고 단번에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이다.

그 근사한 기분은, 어쩌면 내가 아직 젊고 아침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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