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Posts
Recent Comments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관리 메뉴

시간의재

방학식 본문

단상

방학식

물고기군 2000. 5. 8. 01:20

가끔 단 한 장의 풍경으로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전후 문맥 같은 건 없다. 

학교에선 방학식이 있었다. 운동장에 행과 열을 맞춰선 아이들, 터무니없게 쩌렁쩌렁 울리는 단상의 마이크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학교 건물 위 흐린 겨울하늘을 바라본다.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끝나고, 언제나처럼 왼쪽 끝 열, 1반부터 차례로 건물로 들어간다. 그렇게 순서를 정해놓아도 항상 건물 입구는 먼저 들어가려는 조급한 아이들로 이리저리 밀리곤 했다. 건물은 낡아서 습습한 시멘트 냄새가 났다. 담임 선생님이 이런저런 공지사항들 - 방학숙제, 예비소집일, 비상연락망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옆 반은 이미 끝났는지 복도가 시끄럽다. 가방에는 금방 받은 가정통신문과 탐구생활이 들어 있다. 교문 밖을 나서 친구들끼리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걸어가다 각자의 집 방향으로 갈라진 후, 혼자 걷는 한 이 삼분 정도의 거리, 나는 텅 빈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보기도 하고, 멈춰 서 숨을 깊이 들이키기도 한다. 날은 춥다. 그러다 괜히 기분이 좋아 가방을 흔들며 달려보기도 한다. 우리 동 아파트 입구쯤에 이르면 숨이 찬다. 성큼성큼 두 칸씩 계단을 오른다. 가방을 휙 하니 아무데다 던져놓고, 마루의 소파 위를 두 발로 올라선다. 푹신한 소파 위에선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다. 왼쪽 오른쪽으로 이리저리 무게 중심을 옮기며 장난을 친다. 창문은 꼭꼭 닫혀 있다. 이상하게도 닫힌 창문을 통해 들리는 바람소리는 더 크다. 아직 오전인데도 날은 흐려서 바깥은 어둑어둑하다. 멀리 목도리를 귀밑까지 감싼 사람 하나가 큰길가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없다. 내일부터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 겨울방학은 길고, 게다가 이제 막 시작했다. 

근데 무슨 일이 일어났다. 나는 문득 몸의 균형을 잡고, 무릎을 소파 등받이에 댄 채, 창문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한다. 창 면에 손을 짚는다. 뭘까? 놀이터를 둘러싸고 똑같은 색깔과 똑같은 층의 아파트 건물들이 열을 맞춰 서 있다. 잎을 다 떨군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소리만 크다. 아무것도 날리지 않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까의 사람은 이미 큰길까지 나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잠시 앉았던 놀이터의 벤치와, 내가 달려온 길들을 더듬는다. 마치 거기에 내가 아직도 앉아 있고, 내가 아직도 달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여기 있다. 흐린 겨울 오전의 빛깔은 창 가까이까지 다가와 있다. 나는 흠칫 놀라 소파에서 내려온다. 

집 안엔 아무도 없다. 할머니는 방학식인 줄 모르고 내가 늦게 돌아오는지 알고 있다. 시계를 본다. 형은 언제 돌아오는 걸까? 옅은 어둠이 집 안 이곳저곳에 고여있다. 사물의 그림자는 마치 바닥에 뚫린 구멍 같다. 나는 꼼짝달싹 할 수 없다. 하지만 무서웠던 건 아니다. 그저 모든 게 낯설었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아니 내가 어디도 아닌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방학식이 끝났고, 여느 때와 똑같은 하굣길을 걸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집 안에 있다. 그것은 분명 공포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외로웠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시선을 돌리면 세상의 모습은 바뀐다. 이건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세상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내가 시선을 돌린 것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이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그 뒤 얘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집 안의 모든 불을 켰던 것 같기도 하고, 금방 방학식 날의 들뜸으로 돌아가서 다시 소파 위로 뛰어 올라갔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국민학생이었으니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그 풍경이 떠올랐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 풍경을 이렇게 긴 문장으로 적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다만 추측해볼 뿐. 아마, 지금 내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닐까? 외로움도 두려움도 아닌, 어떤 슬픔이 또 나를 붙든 건 아닌지. 아직도 나는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게 아닌지.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녘 홈페이지 1주년  (0) 2000.05.11
식혜  (0) 2000.05.08
귀환  (0) 2000.05.05
오후 2시 반  (0) 2000.05.01
문득, 검은색 바탕에 씌여진 하얀 글씨를 보고 싶었다.  (0) 2000.04.29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