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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통신

물고기통신 51

물고기군 2002. 6. 14. 18:22
최근에 어떤 후배의 문장을 읽다가 참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꼭 한 번 그 친구에게 너는 왜 문장을 쓰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물론 사람들마다 문장을 쓰는 이유는 제각각입니다. 소설을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경우도 있고, 거기서 출발해 더 나아가는 문장도 있습니다. (저는 이 ‘개인적인 심정’에서 출발하는 문장을 참 좋아합니다만.) 또한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향해(위해) 쓰는 문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문장에는 기본적인 원칙이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원칙을 배우기 위한 가장 좋은 교재는 (문득 든 생각이지만), 어쩌면 ‘제품 사용 설명서’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품 사용 설명서야말로 우리가 문장을 쓰는 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원칙들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습니다. 그건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에 대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이해와 쉽고 간단하지만 ‘정확하고’ 충분한 표현력. 물론 모든 일이 그런 것처럼, 이것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겠지만, 이러한 원칙들이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문장이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칙들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수사법, 또는 비유법 같은 건 무용지물입니다. 아무리 문학적인 수사와 화려한 비유가 가득하다 해도, 작가가 그리는 세계가 작가 자신에게조차도 뚜렷하지 않은 것이라면, 또한 그러한 이유로 문장들이 대체 뭘 얘기하고 있는지 독자들이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실패한 문장입니다. 감히 단언컨대 ‘잘 씌어진 제품 사용 설명서’는 그 어떤 소설의 문장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제품 사용 설명서’의 문장에도 분명 스타일이 있습니다. 가끔 ‘스타일’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장이든 구성이든) 기법상의 문제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깊숙이 개입된 소위 예술적인 문장에만 국한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스타일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쉽게 발견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알고 있는 뻔한 얘기라 해도, 그것을 남들과 다르게 오직 자기만의 문장으로 쓰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이전에도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스타일은 문장을 통해서 드러나는 기법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작가가 문장을 쓰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바라보는 세계의 상(像)에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쓰든지 간에, 그 세계는 이미 작가 안에 들어 있고, 당연히 문장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찍는 쉼표, 마침표 하나하나에도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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