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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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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접속사적인 휴식

물고기군 1998. 6. 29. 23:47
   접속사적인 휴식이란 게 있어. '그러나',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등등의 휴식, 정확히 어떤 접속사인지 몰라도 지금의 내가 그런 것 같아. 너무 오랫동안 적당한 접속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지만.
   오랫동안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가는 게 뭔지 잊고 있었나봐. 매일같이 친구의 차를 타고 학교를 통학하다 친구가 이사를 가는 통에 최근 며칠동안 전철을 타고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아, 그래 전철을 타고, 한시간이 넘도록 전철을 타고 학교를 간다는 게 이런 것이었지 싶더라. 혹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머나먼 쏭바강'이란 SBS 월화 특별기획 드라마가 있었더랬지. 36부작이었던가, 하여간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 화요일 9시에 정확히 시작하던 드라마였으니까 기간으로 치면 넉 달 보름 정도였을거야. 글쎄, 난 그걸 단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봤던거야. 넉 달 보름 동안 매주 월요일, 화요일 저녁 9시엔 정확히 TV앞에 앉아 있었던거지. 1994년의 여름. 참 쓸쓸한 넉 달 보름이었어. 접속사적인 휴식기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예전에 몇 번이나 되풀이 읽었던 소설책을 들고 아무 곳이나 펼쳐지는 대로 읽으면서 옥수역에서 열차를 기다렸어. 눈이 부시면 고개를 들고 눈앞에 펼쳐진 강을 바라보았지.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들. 공기는 청량했고, 햇빛은 따갑지 않고 그냥 조금 눈부셨어. 여름의 냄새가 났어. 행복한 여름의 냄새. 한숨을 쉬고 배차간격이 20분이 넘는 한 대의 열차를 그냥 보내 버렸어. 바보같이.
   <이봐, 모든 건 끝났어. 그녀를 위한 조촐한 너의 의식은 충분했어.>
   정말 그럴까? 충분했다구?
   <넌 대단한 걸 잃어버린 양 호들갑을 떨지만, 마치 세상 전부를 잃은 것처럼 말이야. 허나 네가 잃은 건 그녀가 네게 주었던 '다정함'일 뿐이야. 하나의 사랑도, 4월의 100퍼센트의 소녀도, fresh한 겐조 향수내음도, 자주 쓰다듬던 머리칼도,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도 아닌 여자의 친절한 배려, 다정함,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그건 이미 사라졌어. 오래된 책에서 10년전의 나뭇잎 책갈피를 찾아내듯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괜찮아. 누구나 알겠지만 '다정함'에는 개성이 없지. 더 예쁜 다정함이 없듯이, 더 못난 다정함도 없고, 호감이 가는 다정함, 혹은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다정함도 없어. 다정함은 다정함일 뿐이라고. 물론 꼭 같진 않겠지만 그녀가 줬던 그만큼의 다정함은 언제든 구할 수 있을거야. 처음엔 힘들겠지. 울리지 않는 방 전화나, 하루종일 no page인 호출기,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래도 잊어버려. 좋은 사람이었어. 그러나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어. 술도 그만 마시고, 현실적인 삶에 적응해야지. 이번에 오는 열차는 꼭 타야 돼. 응?>
     우습군. 하지만, 자네 말은 설득력은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게 빠져 있다구. 그게 뭔 줄 알아? 자네에겐 결정적으로 유머감각이 부족해.
     어쨌든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어. 열차 같은 건 잊어버려. 열차는 언제든 탈 수 있는 거니까 마음 쓰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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